[이민 120주년]① 하와이로 향한 한인의 물결…세계로 퍼졌다
[이민 120주년]① 하와이로 향한 한인의 물결…세계로 퍼졌다
  • 홍현기
  • 승인 2022.12.20 0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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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이주·입양 아픔도…"한인 이주는 거주국 역사에 기록 남겨"

[이민 120주년]① 하와이로 향한 한인의 물결…세계로 퍼졌다

강제이주·입양 아픔도…"한인 이주는 거주국 역사에 기록 남겨"

최초 하와이 이민선 갤릭호
[국가기록원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편집자 주 = 한인 이민의 역사는 120년 전 인천에서 시작됐습니다. 1902년 12월 인천항에서 하와이로 떠난 121명을 기점으로 이민자들은 세계 각국으로 퍼져 오늘날 재외동포 규모가 180개국 732만명으로 확대됐습니다. 재외동포들은 각국의 정계와 재계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약하면서 한국의 위상을 높이고 있습니다.

연합뉴스는 한인 이민 120주년을 맞아 이민 역사와 재외동포 등을 조명하는 기사를 2차례에 걸쳐 송고합니다.]

(인천=연합뉴스) 홍현기 기자 = 120년 전인 1902년 12월 22일은 한국 이민의 물결이 시작된 날이다.

배고픔에서 벗어나려고 인천 제물포항에서 출발한 한인들은 낯선 이국땅 하와이에서 고된 노동을 견디며 새로운 삶을 개척했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오대양 육대주 세계 방방곡곡을 개척하며 한민족의 외연을 확장한 불굴의 의지는 대한민국을 세계 최빈국에서 선진국 반열에 올려놓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 하와이서 삶의 터전 개척한 한인들

조선 말기인 1902년 인천에서 출발한 최초 한인 이민단은 121명으로 구성됐다. 경유지인 일본 나가사키에서 이들 중 102명만 신체검사에 합격하고 하와이행 선박 갤릭호에 옮겨탄다.

이들은 인천에서 출발한 지 약 20일만인 1903년 1월 12일 하와이에 도착하지만 16명은 질병으로 송환 당하고 86명만 최종 상륙 허가를 받는다.

이민단 구성원들은 국내에서 사회 혼란이 심해지고 계속되는 흉년에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자 배고픔에 이민을 선택했다고 한다.

공식 이민이 시작된 뒤 1905년까지 하와이로 향한 한인은 64차례에 걸쳐 7천400여명에 달했다.

한국이민사박물관에 있는 사탕수수농장 노동자 모형
[촬영 홍현기]

지금은 세계 최고의 휴양지로 주목받는 하와이지만 현지 사탕수수농장에서 일한 이들의 삶은 노예에 비유될 정도로 비참했다.

이민자들은 무더운 태양 아래서 호미와 괭이로 농장을 일구고 억센 수숫대를 칼로 잘라냈다. 허리가 아파 잠시 일어서면 말을 탄 감독이 가죽 채찍을 내리쳤다고 한다.

하지만 한인들은 고된 노동을 견디며 하와이에서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삶의 터전을 개척했다.

한인 가정의 중심에는 700여명의 '사진신부'가 있었다. 중매쟁이를 통해 남편감의 사진만 보고 하와이로 건너온 한인 여성들은 열악한 현지 환경에 실망했지만 이내 강인한 정신력으로 자녀를 키워냈다.

이들 이민 1세대의 후손 상당수는 하와이에 그대로 남거나 미국 본토로 건너가면서 현지 한인 사회를 형성했다.

박현순 인하대학교 대외협력처장은 20일 "하와이로 떠난 분들이 현지에서 피땀 흘려 모은 자금을 고국에 보내줘 인하대 설립의 기반이 되기도 했다"며 "인하대라는 이름도 인천의 '인(仁)', 하와이의 '하(荷)'에서 따 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와이 한인기독학원 학생들의 모습
[크리스천헤럴드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일제강점기 강제이주 아픔…한국전쟁 이후 해외입양 증가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제국주의의 횡포를 피해 어쩔 수 없이 다른 국가로 이주하는 한인들이 많았다.

일제 통치하에 토지와 생산수단을 빼앗긴 농민과 노동자들은 만주와 일본으로 이주했다.

일제가 만주 개발을 위해 대규모 한인 집단이주를 추진하면서 1930년대 후반 만주의 한인 인구는 50만명 이상으로 증가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 장기화에 따라 일제가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하고 한인 등을 강제 동원하면서 한인들은 러시아나 일본 본토 등지로도 많이 끌려갔다.

독립운동가들도 국내에서 활동하는 데 어려움이 있자 미국·중국·러시아 등지로 이주했고, 현지에서 독립운동을 이끌기도 했다.

3·1운동이 있었던 1919년 만주 지역 31곳에서는 12만명 이상이 만세 운동을 벌였다고 한다. 러시아 연해주와 우수리스크, 미국 하와이와 필라델피아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전쟁고아나 미군과 결혼한 여성 등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해외 이민을 떠나는 사례가 많았다.

1955년 시작된 해외입양을 통해서도 지금까지 20만명이 넘는 아동이 해외로 떠난 것으로 추산된다.

독일에서 간호사로 근무한 한인(왼쪽에서 3번째)
[한국이민사박물관 제공(박정숙 기증). 재판매 및 DB 금지]

◇ "잘살아 보자"…세계로 퍼져나간 이민의 물결

1962년 해외이민법이 제정된 뒤 이민의 물결은 세계 각국으로 퍼져간다.

드넓은 황무지가 있었던 남미 브라질·파라과이·아르헨티나로는 농업 이민 행렬이 이어졌다.

1963년부터는 약 8천명의 광부와 1만명의 간호사들이 계약노동자 신분으로 독일로 이주했다.

1960년대 중반 한인의 이민 문호를 열어주는 미국 이민법 개정 이후에는 미국과 캐나다로 이주도 본격화했다.

한인 이민이 정점을 찍은 1985∼1987년에는 연간 3만5천여명의 한인들이 미국으로 향하면서 한국은 멕시코와 필리핀에 이은 3대 이민국이 되기도 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감소세를 보인 한인 이민은 1997년 외환 위기를 거치면서 다시 증가했고, 오늘날에도 학업·취업·창업 등 다양한 이유로 계속되고 있다.

임영상 한국외대 명예교수는 "지금도 한민족뿐만 아니라 많은 세계인이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나 이주하고 있지만, 대부분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거나 주류 민족에 흡수됐다"며 "한인들은 다른 민족과 달리 거주국의 역사에 '기록'을 남기고 있는 '디아스포라 한인'으로 모국과의 교류 역할도 확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h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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