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노동자 돌보는 라파엘클리닉…"새해엔 의료진 더 늘었으면"
이주노동자 돌보는 라파엘클리닉…"새해엔 의료진 더 늘었으면"
  • 최원정
  • 승인 2024.01.01 08: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매주 일요일 무료 봉사…2023년 마지막 날에도 100여명 진료

이주노동자 돌보는 라파엘클리닉…"새해엔 의료진 더 늘었으면"

매주 일요일 무료 봉사…2023년 마지막 날에도 100여명 진료

라파엘클리닉에서 치과 진료를 받는 이주노동자
[촬영 최원정]

(서울=연합뉴스) 최원정 기자 = "어제부터 기침이 나고 열이 났어요."

40대 이주노동자 A씨가 2023년 마지막 날인 지난달 31일 서울 성북구 성북동 '라파엘클리닉'에서 영어로 증상을 호소했다. 한국에서 건강검진을 한 번도 받은 적 없다는 A씨는 친구 소개로 이곳을 찾았다.

청진기로 A씨를 진찰한 의사는 감기약을 처방하고는 "온 김에 혈압도 재고 가라"고 당부했다. 약을 받은 A씨는 "의사 선생님들께서 어디가 아픈지 친절하게 살펴주셔서 고맙다"고 했다.

이주노동자 무료 진료소 '라파엘클리닉'에는 이날 필리핀·베트남·방글라데시 등에서 온 노동자 100여명이 가정의학과, 내과, 치과 등의 진료를 받았다.

유창한 한국어로 "아픈 친구를 데려왔다"고 말하는 이주노동자에게 간호사가 "친구분의 건강을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웃으며 답하기도 했다.

의사는 "타국에서 힘든 노동을 하는 이주노동자의 특성상 관절염이나 근육통을 호소하는 환자가 많다"며 "다들 체구도 크다 보니 당뇨와 고혈압, 고지혈증 등이 많이 발견된다"고 말했다.

1996년 고(故) 김수환(1922∼2009년) 추기경은 살인 누명을 쓰고 사형을 선고받은 파키스탄 이주노동자의 편지를 받았다. 이를 계기로 이주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에 관심을 갖게 된 김 추기경은 안규리 서울대 의대 교수가 내놓은 이주민 무료 진료 계획을 적극 지원했다.

1997년 3월 서울대 의대 교수들이 모여 '라파엘클리닉'이라는 이름으로 필리핀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혜화동의 성당에서 매주 일요일 무료 진료를 시작했다.

이후 가톨릭대와 동성고 강당을 빌려 가며 진료가 이어졌고 2014년에는 서울대교구의 무상 임대로 클리닉이 지금의 건물에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라파엘클리닉은 매주 일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 3시간 동안 진료한다. 이주노동자 대다수가 평일 주야간은 물론 토요일에도 일하는 탓에 의사 3∼4명을 비롯해 약사·간호사·대학생 등 100여명이 일요일마다 클리닉에 나와 환자를 돌본다.

클리닉은 병원 40여곳과 업무 협약을 맺어 상태가 심각한 환자들을 다른 병원으로 옮겨 정밀 검사를 받을 수 있게 한다. 수술이 필요한 환자에게는 최대 200만원의 비용을 지원해주기도 한다.

라파엘클리닉에서 진료를 기다리는 이주노동자들
[촬영 최원정]

이곳을 찾는 이주노동자 중 대다수가 미등록 신분이다. 건강보험이 없는 데다 급여도 제대로 못 받기 일쑤인 이들은 값비싼 의료비 부담에 병원 갈 엄두도 내지 못한다.

방글라데시에서 온 B(48)씨는 이날 당뇨를 앓는 친구를 클리닉에 데려왔다.

한국에 온 지 20년이 넘어간다는 B씨는 "보험이 안 되는 아픈 친구들이 많은데 비자와 상관 없이 여권만 있으면 치료받을 수 있으니 다들 든든히 기댈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한다"며 "일요일마다 나와서 저희를 도와줘 그저 감사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남명부 라파엘클리닉 국장은 "2주일에 한 번씩 부산에서 올라와 꼬박꼬박 약을 받아 가는 환자도 있다"며 "올해 여름에는 뇌 쪽에서 문제가 발견된 한 몽골 노동자가 완쾌한 뒤 클리닉을 찾아와 '살려줘서 고맙다'고 인사하고 가기도 했다"고 전했다.

황금 같은 주말에도 이곳을 기꺼이 찾아와 자원봉사를 하는 의대·치대·약대·간호대 등의 학생 80여명은 든든한 자원이다.

이곳에서 예진 봉사를 하는 서울대 치과대학 1학년 이도신(24)씨는 "항상 일요일 오전은 봉사 일정으로 비워놔서 올해 마지막 날인 오늘도 그냥 자연스럽게 왔다"며 "특히 치과는 한 2주 동안은 예약이 꽉 찰 만큼 인기가 많아 진료를 못 보고 돌아가는 환자들을 볼 때마다 아쉽다"고 말했다.

라파엘클리닉은 정부 지원 없이 오직 기부와 봉사로만 운영하고 있다. 남 국장은 "아무래도 정부는 법과 원칙을 내세울텐데 그러면 미등록 외국인 진료가 제한될 수도 있다는 걱정 때문에 정부 지원을 신청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코로나19 유행 당시 하루 100여명 수준으로 줄었던 방문 환자는 다시 200명 수준을 넘보고 있다. 오후에도 진료를 이어가고 싶지만 의료진이 확보되지 않아 어려운 실정이다.

"당뇨나 고혈압 환자 등은 주기적으로 약을 먹어야 하는데 예약이 꽉 차서 약도 처방받지 못하고 돌아가기도 합니다. 의료진이 확충되고 후원금도 더 들어와서 이주노동자들이 진료받는 데 지장이 없었으면 하는 것이 새해 소망입니다."

라파엘클리닉 로고
[호암재단 제공]

away777@yna.co.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