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피란 1년] ③ "우린 전쟁 난민…한국어 교육만이라도"
[고려인 피란 1년] ③ "우린 전쟁 난민…한국어 교육만이라도"
  • 양정우
  • 승인 2023.05.2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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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 탈출' 고려인 동포들 인터뷰…'폭격 공포' 속 수천㎞ 국경 넘어
"난 한국인" 고국행 택했으나…생계·주거·의료비 '막막', 강제 이산에 '향수병'도

[고려인 피란 1년] ③ "우린 전쟁 난민…한국어 교육만이라도"

'우크라 탈출' 고려인 동포들 인터뷰…'폭격 공포' 속 수천㎞ 국경 넘어

"난 한국인" 고국행 택했으나…생계·주거·의료비 '막막', 강제 이산에 '향수병'도

 

 

"고국이라 왔지만…일자리가 문제"
(안산=연합뉴스) 양정우 기자 = 이달 17일 경기 안산의 고려인지원단체 '너머'에서 만난 우크라이나 출신 고려인 동포 김 스베틀라나(47). 그는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우크라 전쟁' 공포와 탈출과정, 한국에서 생활고 등을 털어놨다. 2023.5.26 eddie@yna.co.kr

 

 

(안산=연합뉴스) 양정우 기자 = "휴…"

이달 17일 경기 안산의 고려인 지원단체 '너머'에서 만난 우크라이나 출신의 고려인 동포 김 스베틀라나(47)는 러시아의 폭격이 시작됐던 작년 2월 24일 새벽을 떠올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군부대가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포탄이 떨어지고, 병원 건물 대부분도 폭격에 사라졌다고 했다. 그가 살았던 우크라 남부 헤르손은 러시아와 우크라의 공방이 치열했던 곳이라 민간인 피해가 컸다고 설명했다.

러시아 침공 이후 벙커와 지하실, 지상 주택을 옮겨 다니며 피란 생활을 했던 김 스베틀라나는 더는 그곳에 있다가 목숨조차 보전하기가 어려울 거 같아 해외 피란길에 오르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그는 가족과 친지, 지인 등 15명과 함께 3대의 차량에 나눠타고서 크림반도를 향했다. 그렇게 닷새간 크림반도와 라트비아를 거쳐 폴란드에 도착한 그는 전쟁 난민으로서 여러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유럽보다 한국으로 가기를 희망했다.

"제가 한국인인데 당연히 한국으로 가야죠."

그는 지난해 8월 고국의 품에 안겼으나 이곳에서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언어라는 난관에 건강 문제까지 겹치며 단순한 일조차도 하지 못했기 때문. 함께 한국에 온 친언니 도움으로 생계를 이어오고는 있지만, 언니가 하루 12∼14시간씩 일하다 녹초가 돼 온 돌아오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고 털어놨다.

"올해 쉰살인 언니가 집에 올 때마다 너무 힘이 없어 보여요. 함께 온 조카의 아내들이 모두 우크라이나 여성들인데 '방문동거(F-1)' 비자다 보니 취업도 할 수 없고, 아빠(조카)들의 벌이만으로 살아야 하는 실정이죠. 일자리가 문제입니다."

 

 

인터뷰하는 우크라 출신 고려인 동포
(안산=연합뉴스) 양정우 기자 =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한국으로 이주한 고려인 동포 정 이고르 씨(60·오른쪽)가 지난 17일 경기 안산 단원구 선부동의 고려인 지원단체 '너머'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2023.5.24 eddie@yna.co.kr

 

김 스베틀라나에 앞서 만난 정 이고르(60)도 생활고를 토로하기는 마찬가지다.

우크라 남부 출신인 그는 무려 3천700㎞를 차로 달린 끝에 한국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전쟁이 한창인 우크라에서는 60세 이하 남성은 징집 대상이다. 언제 전장에 끌려갈지 모를 두려움에 벙커에서 숨어지내다 아내, 지인과 함께 가까스로 피난길에 올랐다. 조지아(러시아명 그루지야)를 거쳐 딸이 있던 튀르키예까지 가는 동안 군인들에게 통행비 조로 뇌물을 주고 국경을 넘기도 했다.

그는 유럽에 남는 것도 고민했으나, 현지에서 고려인 동포들의 한국 입국을 도왔던 김종홍 목사를 만나고서 고국행을 택했다.

과거 한국에서 5년간 목수로 일했던 경험이 있는 그는 비교적 한국 생활에 자신감을 가질 법도 했으나 불행을 피해 가지 못했다.

"한국 생활이 낯설지 않았어요. 그런데 갑자기 찾아온 심근경색으로 긴급 수술을 받아야 했어요. 입국 후 6개월이 넘지 않았던 때라 의료보험이 없었어요. 수술비만 3천만원이 나왔습니다."

그는 수술비 마련에 다급했던 일이 떠오른 듯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

"그나마 저는 한국에 온 적이 있어서 소통은 되는 편이지만, 이곳에 처음 오는 분들은 아예 소통이 되지 않습니다. 유럽처럼 (전쟁 난민에게) 생계비, 식비, 주거비까지는 아니어도 단 몇개월 만이라도 한국어 교육을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정 이고르는 "우크라이나에 폭격만 중단되면 돌아가고 싶다"면서 "러시아로부터 해방을 기다리고 있다"고 바람을 전했다.

 

 

'우크라 전쟁' 강제이산…"가족과 떨어져 있는 게 힘들어요"
(안산=연합뉴스) 양정우 기자 = 이달 17일 경기 안산의 고려인지원단체 '너머'에서 만난 우크라이나 출신 고려인 동포 김 리디야(75·왼쪽). 그는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전쟁이 끝나면 우크라이나로 돌아가고 싶다. 가족이 모두 떨어져 사는 게 가장 힘들다"고 토로했다. 그는 정중히 앞모습 촬영을 사양했다. 2023.5.26 eddie@yna.co.kr

 

고려인 지원 단체 '너머' 사무실로 기자를 만나러 일찌감치 도착한 김 리디야(75)도 우크라 전쟁 뒤로 딸, 손주 5명과 함께 루마니아를 거쳐 한국에 왔다.

헤르손 출신인 그는 폭격이 멈추지 않자, 그나마 해외로 피신할 수 있을 때 대피하자는 마음으로 기차에 올랐다고 했다. 작년 10월 한국에 온 뒤로 일을 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손에 힘이 빠지면서 그만둔 상태다.

그에게 한국을 택한 이유를 묻자 "손자가 한국으로 가기를 희망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딸과 나머지 자녀들이 한국에 아직 못 왔다. 그런데 여기 오더라도 일을 찾기 어렵고, 사는 것도 원룸에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손자는 한국에 남기를 희망하지만, 저는 전쟁이 끝나면 우크라이나로 돌아가고 싶어요. 가족이 모두 떨어져 사는 게 가장 힘든 일이지요."

eddi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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