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In] 26년 전 '증오의 상징'에서 '희망의 상징' 된 호주 국기
[이슈 In] 26년 전 '증오의 상징'에서 '희망의 상징' 된 호주 국기
  • 정열
  • 승인 2022.09.09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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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보트피플' 출신 하원의원, 호주 국기 의상 등원 화제
1996년 '백호주의 정치인' 핸슨의 국기 퍼포먼스와 대조

[이슈 In] 26년 전 '증오의 상징'에서 '희망의 상징' 된 호주 국기

베트남 '보트피플' 출신 하원의원, 호주 국기 의상 등원 화제

1996년 '백호주의 정치인' 핸슨의 국기 퍼포먼스와 대조

(서울=연합뉴스) 정열 기자 = 지난 5일 베트남 난민 출신인 다이 리 호주 하원의원은 호주 국기 문양이 새겨진 베트남 전통의상 '아오자이'를 입고 캔버라 국회의사당에 등원해 눈길을 끌었다.

다이 리 호주 하원의원 [스카이뉴스 오스트레일리아 캡처]

리 의원은 7살 때 가족과 목선을 타고 베트남을 탈출한 뒤 필리핀과 홍콩 등지의 난민촌을 전전하다가 11살 때이던 1979년 호주에 정착했다.

리 의원은 등원 연설에서 "시드니 킹스포드 스미스 공항에 도착했을 때 감사와 자유의 감정을 느꼈고, 호주는 내 가족을 환영했다"며 "호주 국기는 희망과 자유, 무한한 가능성의 상징"이라고 말했다.

리 의원의 연설을 듣기 위해 하원 방청석을 찾았던 100여 명의 지지자는 기립박수를 보냈다.

◇ 26년 전 '백호주의 정치인'도 호주 국기 의상 등원

6일 호주 일간 시드니모닝헤럴드(SMH)는 리 의원의 호주 국기 문양 의상 등원에 대해 "26년 전 증오의 상징이던 호주 국기가 희망의 상징이 됐다"고 짚었다.

1996년 9월 같은 장소에서는 당시 무소속 하원의원이던 폴린 핸슨이 호주 국기 문양 의상을 입고 등원해 아시아계 이민자들을 비난하는 연설을 했다고 SMH는 전했다.

반(反)아시아·반이민 성향 정치인인 핸슨은 당시 연설에서 "밀려드는 아시아계 이민자들이 우리를 집어삼킬 위험에 처했다"며 백호주의의 부활을 주장했다.

호주 국기 문양 의상을 입고 백호주의의 부활을 주장한 핸슨과 같은 정치인 때문에 호주에서는 종종 호주 국기가 인종차별주의자들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폴린 핸슨 호주 상원의원 [EPA=연합뉴스 자료사진]

백인우월주의자들의 집회나 시위에서도 호주 국기는 빠지지 않는 아이템이다.

과격한 인종차별주의적 발언으로 자유당에서 축출된 핸슨은 1997년 반아시아·반이민 정책을 표방하는 극우주의 정당 일국당(一國黨)을 창당해 호주 정계에 파문을 일으켰다.

1996년 퀸즐랜드주 옥슬리 지역구에서 하원의원으로 당선됐던 핸슨은 2001년 이후 출마한 5번의 선거에서 줄줄이 낙선하며 존재감이 희미해졌다가 2016년 상원의원이 되면서 부활했다.

호주에서는 1973년 백호주의 정책이 공식 폐기된 뒤에도 핸슨과 같은 극우파 정치인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백인우월주의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면서 아시아계 이민자들과 갈등을 빚고 있다.

2005년 시드니 남부 크로눌라에서 발생했던 백인우월주의자들의 인종차별 시위나 2009년 멜버른을 중심으로 확산했던 인도 유학생 연쇄폭행 사건 등이 대표적 사례다.

베트남 이민자 출신 작가인 캣-타오 응우옌은 SMH에 "핸슨과 같은 인물들의 영향으로 나와 같은 베트남계 이민자들은 어렸을 때부터 방과 후 귀가할 때나 길거리 또는 슈퍼마켓에서 노골적 폭언이나 돌발적인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며 "다이 리의 '호주 국기 의상'은 희망의 상징"이라고 말했다.

호주 공영 SBS방송은 리 의원이 연설에서 "호주 국기는 난민이었던 나를 환영해준 나라인 호주와 함께 희망, 자유, 무한한 가능성을 상징한다"고 말했다며 그가 핸슨과 완전히 다른 의미로 의상을 착용했다고 전했다.

호주 일간 디오스트레일리안도 "리 의원과 같은 방식으로 호주 국기 문양 의상을 입었던 마지막 정치인은 폴린 핸슨"이라며 "리 의원이 호주 국기의 의미를 되찾았다"고 평가했다.

◇ 다문화 색채 강해지는 호주 의회…아시아계 3명→6명

비록 49년 전에 공식 폐기되긴 했지만 백호주의 정서가 뿌리 깊은 호주에서는 무엇보다 백인 일색인 연방 의회가 달라진 인구구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약 2천500만 명에 달하는 호주 전체 인구 중 아시아계 비중이 16%에 달하지만 불과 수년 전까지만 해도 151명에 달하는 호주 연방 하원의원 중 아시아계 의원이 한 명도 없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2019년 치러진 총선에서 아시아계 하원의원이 3명 탄생했고, 올해 5월 치러진 총선에서는 모두 6명이 당선됐다.

페니 웡 호주 외무장관 [EPA=연합뉴스 자료사진]

시드니 남서부 파울러 지역구에서 당선된 리 의원 외에도 타밀계 미셸 아난다-라자, 중국계 셀리 시토우와 샘 림, 스리랑카계 카산드라 페르난도, 인도계 자네타 마스카레나스 등이 하원의원이 됐다.

특히 ABC방송 기자 출신인 리 의원은 무소속으로 출마해 노동당의 거물급 후보 크리스티나 키닐리 전 뉴사우스웨일스(NSW) 주총리를 상대로 압승을 거두며 이변의 주인공이 됐다.

리 당선자는 당선 직후 트위터에 "온 가족이 살아남기 위해 난민선을 타고 바다 한가운데를 떠돌다가 호주에서 새로운 삶을 재건하던 시절을 아직도 기억한다"면서 "파울러 시민들의 선택을 받아 당선됐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소감을 밝혔다.

앤서니 앨버니지 당수가 이끈 노동당이 자유·국민연합의 4연속 집권을 저지하고 8년 9개월 만의 정권 교체에 성공한 이번 총선에서 주요 정당은 다문화 유권자가 많은 경합 지역구를 중심으로 아시아계 후보를 다수 공천했다.

전통적으로 다문화 정책을 지지해온 노동당 정권은 중국계인 페니 웡 상원의원을 호주 최초의 아시아계 외무장관으로 임명하는 등 전임 자유·국민 연립당 정부와는 차별화된 행보를 보이고 있다.

passio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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