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외국인 정책, 지금보다 더 포용적이었다"
"고려시대 외국인 정책, 지금보다 더 포용적이었다"
  • 양태삼
  • 승인 2021.12.09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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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바른 박사 '고려 시대 외국인 이주 논문, 이민학회 논문상 수상
"외국인이 고위 관료 지내…차별 없이 기회 줬다"

"고려시대 외국인 정책, 지금보다 더 포용적이었다"

이바른 박사 '고려 시대 외국인 이주 논문, 이민학회 논문상 수상

"외국인이 고위 관료 지내…차별 없이 기회 줬다"

(서울=연합뉴스) 양태삼 기자 = "고려 시대에는 외국인이 지금의 2급에 해당하는 고위 공무원까지 지냈습니다. 우리의 외국인 정책은 이처럼 본래 유연하고 포용적이었습니다."

이바른 박사(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는 '고려 시대 외국인 이주 연구'라는 논문으로 지난 8월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은 한국이민학회가 최근 2년간 박사 학위를 받은 논문을 대상으로 올해부터 시상하는 '박사논문상'의 영예를 차지했다.

이 박사는 9일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역사학도인 제가 다른 전공 분야의 학회에서 주는 논문상을 받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라며 "역사에만 한정하지 않고 여러 분야로 시각을 폭넓게 확장해 더 좋은 성과를 내 '환기'의 역할을 하라는 격려의 뜻으로 새긴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 논문은 특정 사건이나 시기를 다룬 다른 역사 논문과 달리 500년에 육박하는 고려 시대 474년 역사에서 송나라, 발해 유민, 거란, 여진, 금나라와 원나라, 심지어 왜구에 이르기까지 외국인의 이주를 조망하고 그 배경과 영향 등을 분석했다.

이바른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이바른 교수 제공 [재배포 및 DB 금지]

논문에 따르면 고려에 살았거나 왕래했던 외국인은 연 수십만 명에 달해 인구가 약 250만 명으로 지금보다 훨씬 적었던 고려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했다.

특히 1033년(덕종 2년) 한 해 동안 기록된 고려사 기사 53건 중 절반가량인 26건이 외국인의 왕래·이주와 관련한 것일 정도로 외국인의 활동이 활발했다.

논문은 지금의 귀화와 같은 뜻인 내투(來投), 내분(來奔), 내부(來附) 등 고려 시대 용어를 분석하면서 당시 외국인들의 활발한 활동 사례를 전한다.

구체적으로는 국가 최고 의식인 불교 행사 팔관회에서 음악을 암송했던 송나라 출신 음악가 기중립, 경기도 이천에 살았던 일본인 도요미도(道要彌刀), 왜구 무리를 이끌고 내투해 순천과 연기에 살았던 등경광(藤輕光) 등이 있었다.

이처럼 외국인의 이주와 왕래가 잦은 것에 대해 이 박사는 "복잡한 국제 정세가 가장 큰 영향을 줬지만, 고려의 외국인 정책도 지금보다 더 유연했다"고 설명했다.

현시대까지 영향을 미치는 고려 시대의 외국인 사례로는 덕수 장씨의 시조인 장순룡이 위구르계 출신으로 충렬왕 때 건너와 정착한 사실을 꼽았다.

그는 "장순룡의 후손이 한반도에 정착해 지금의 우리 중 일부를 이루고 있으니 이게 지금과 별개의 '남 이야기'라고 할 수 없다"며 "이런 점을 잘 정리하면 현재에도 발전적인 이야기를 할 소재와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왕권이나 행정권이 약해 외국인의 지역 점거를 방치한 것은 아니냐는 질문에는 "고려는 외국인의 출신(국가와 민족), 인원수, 신분 내력 등 특이사항을 행정관리 체계인 '편적'(編籍)에 넣어 죄다 파악했고, 대규모로 왔을 때는 일정 규모로 나눠 거처토록 한 '분치'(分置)를 했다"며 "고려가 행정력을 갖추지 않았더라면 그런 조치는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현대적 개념으로 보자면 이들이 '영주권'을 얻은 상태라고 보면 된다"며 "고려 시대 정책이 지금보다 더 포용적이었던 셈"이라고 강조했다.

tsya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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