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화교 두 명이 국립현충원에 묻힌 사연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화교 두 명이 국립현충원에 묻힌 사연
  • 이희용
  • 승인 2019.05.1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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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의 글로벌시대] 화교 두 명이 국립현충원에 묻힌 사연

 

 

1971년 12월 열린 한국전 참전 화교 종군기장 수여식 [국가기록원 제공]

 

(서울=연합뉴스)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의 애국지사 묘역 바로 옆에는 외국인 묘소 2기가 조성돼 있다. 무덤 옆에는 각각 '從軍華僑姜惠霖之墓(종군화교 강혜림지묘)'와 '從軍華僑魏緖舫之墓(종군화교 위서방지묘)'라고 새긴 묘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 안장된 18만1천979위(2019년 4월 30일 기준) 가운데 순수한 외국인은 이 둘과 애국지사 묘역에 잠들어 있는 캐나다 출신 의료선교사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석호필·石虎弼)를 포함해 3위뿐이다.

 

산둥(山東)성 치샤(栖霞)현 출신의 강혜림(장후이린)은 중국 국민당의 국부군(國府軍) 부대원으로 중국 공산당의 홍군(紅軍)과 전투를 치른 경험을 지녔다. 평양에서 중화요리 음식점을 운영하던 중 중공군(중국인민지원군)이 한국전에 개입하자 1950년 11월 국군에 자진 입대했다. 육군 제1보병사단 15연대에 배속돼 적군의 동향 수색과 포로 심문 등의 임무를 맡았는데, 그가 속한 부대를 중국인특별수색대라고 불렀다.

 

 

국립서울현충원에 조성된 종군 화교 강혜림의 묘. [국립서울현충원 제공]

 

1951년 1월 말 국군 15연대는 서울 재탈환을 목표로 경기도 안성에서 과천까지 밀고 올라갔다. 중공군은 관악산 주요 봉우리에 진지를 구축해놓아 돌파가 쉽지 않았다. 강혜림은 중공군으로 위장해 적진에 침투했다. 적의 진지 8곳을 격파하는 그의 눈부신 활약 속에 국군은 관악산을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혜림은 실탄이 다 떨어진 상태에서 백병전을 벌이던 중 적군의 총탄을 맞고 27세의 나이로 1951년 2월 2일 숨졌다.

 

그의 유해는 부산 화교소학교에 임시 안치됐다가 정부가 주한 자유중국(대만) 대사관과 화교 전우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1964년 12월 12일 국립묘지 제24묘역에 안장했다.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이며 1970년 이곳에 묻힌 스코필드보다 6년 앞선 것이다. 그에 앞서 1959년에는 은성화랑무공훈장이 추서됐다.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는 종군 화교 위서방의 묘. [국립서울현충원 제공]

 

위서방(웨이쉬팡)은 1923년 지금의 랴오닝(遼寧)성 단둥(丹東)시인 중국 안둥(安東)성 안둥(安東)시에서 태어나 신의주에서 살다가 1945년 안둥경찰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국부군 대위로 근무했다. 1949년 국공내전(國共內戰)이 끝나자 신의주로 돌아와 평양 인근 장산탄광 광부로 취업했다.

 

화교 청년들과 함께 한중반공애국단(韓中反共愛國團)을 조직해 1950년 10월 국군의 평양 입성을 도왔고 국군 15연대의 중국인특별수색대를 이끌었다. 화교 47명으로 이뤄진 이 부대는 1950년 12월 24일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에서 중공군 4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함으로써 중공군이 처음 38선 이남까지 진출했다는 증거를 확인했다. 이밖에도 강혜림이 전사한 과천지구 전투를 비롯해 서울 재탈환작전 등에서 맹활약했다. 이 공로로 금성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2012년 5월 15일 강혜림의 묘 이장과 함께 강혜림·위서방 추모식이 열리고 있다. [국립서울현충원 제공]

 

 

위서방은 전쟁이 끝난 뒤 한의사가 됐다. 강릉에서 극빈자를 무료 진료하고 장학사업에 앞장서는 등 사회공헌활동에도 힘쓰다가 1989년 6월 25일 별세했다. 정부는 그해 12월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1990년 3월 20일 국립서울현충원 제12묘역에 안장했다.

 

2012년 5월 15일에는 강혜림 묘소를 위서방 묘소 옆으로 이전하면서 별도의 외국인 묘소로 꾸몄다. 전쟁터에서 생사가 엇갈린 전우가 호국 영령으로 만나 나란히 잠든 것이다. 국내 화교들은 해마다 5월 15일에 6·25 참전자 추모식을 올린다. 이날이 화교 현충일인 셈이다.

 

 

화교 종군기장 수여식에 참석한 주요 인사. 왼쪽부터 종군 화교 오중현, 유국화, 국방부 김재명 장군, 나아통, 위서방. [국가기록원 제공]

 

1951년 3월에는 HID(육군첩보부대) 산하에 정식 중국인부대 4863부대 SC지대가 창설됐다. SC는 서울 차이니즈(Seoul Chinese)의 머리글자를 딴 것이다. SC지대는 경기도 문산과 서울 사직공원에서 10주간 훈련을 받은 뒤 강화도에 딸린 교동도에 본부를 두고 특수작전을 수행했다.

 

대원 200명 가운데 무장대원 70여 명은 적 후방에 침투해 첩보 수집, 요인 납치, 시설 파괴 등에 나섰다. 이들은 유창한 중국어와 한국어 실력을 무기로 중공군을 만나면 북한 인민군으로 행세하고, 인민군을 만나면 중공군인 척했다고 한다. 나머지는 후방에서 포로 설득과 심문, 선무 방송, 심리전 등의 임무를 해냈다.

 

무장대원 가운데 40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는 큰 희생을 치르고도 종군 화교들은 외국인이어서 참전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육군 6사단 HID 제6지대의 오중현(吳中賢·우종시앤) 대원에게 충무무공훈장이 수여되고 1971년 12월 53명이 종군기장, 1975년 9월 10명이 보국포장을 각각 받은 것이 전부였다.

 

 

지난 4월 3일 인천국제공항에서 열린 제6차 중국군 유해 인도식에서 중국군 의장대가 유해 봉안함을 중국 수송기로 운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6·25는 우리 민족끼리 총칼을 겨누고 인명을 살상한 현대사의 비극이었다. 이 전쟁은 중국인에게도 동족상잔이라는 가혹한 운명의 굴레를 씌웠다. 중화인민공화국(중공) 군대가 '미(美) 제국주의의 확산을 막고 혈맹 조선(북한)을 돕는다'는 항미원조(抗美援朝)를 명분으로 참전했다면 종군 화교들은 병역 의무가 없음에도 당시 모국인 자유중국(대만)의 비공식적 지원 속에 '제2의 조국'인 한국을 지켜내고자 젊음을 바쳤다.

 

그로부터 40년 뒤인 1992년 한국은 중공과 수교하며 자유중국과 외교 관계를 끊었다. 자유중국은 대만이 된 대신 중공이 중국이 됐다. 정부는 2014년 중국과의 합의에 따라 지난 4월까지 6차례에 걸쳐 모두 599구의 중국군 시신을 중국으로 송환했다. 현재 발굴 작업이 중단되긴 했지만 북한도 지난해 7월 미군 유해 55구를 돌려보냈다.

 

강혜림의 묘비 아래 새겨진 '義魄長存'(의백장존)이라는 글귀처럼 종군 화교들의 의로운 넋이 우리에게 오래도록 기억되고. 북녘땅에서 외로운 혼으로 떠돌고 있을 전사·실종 화교들의 유해도 하루빨리 유족 곁으로 송환돼 안식을 누리기를 바란다. (한민족센터 고문)

 

 

hee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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