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미국 '흑인 사망' 시위가 우려스러운 까닭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미국 '흑인 사망' 시위가 우려스러운 까닭
  • 이희용
  • 승인 2020.06.01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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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의 글로벌시대] 미국 '흑인 사망' 시위가 우려스러운 까닭

백인 경찰의 가혹행위로 비무장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숨지자 5월 26일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시민들이 '흑인을 죽이는 짓을 그만두라'는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1991년 3월 30일 밤 미국 LA 근교 고속도로에서 흑인 운전자가 경찰 순찰차의 정지신호를 무시하고 승용차를 과속으로 몰다가 붙잡혔다. 그는 무심코 바지 뒷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차에서 내리다가 무기를 소지한 것으로 의심을 샀다. 백인 경찰 4명은 손에 수갑을 채운 뒤 사정없이 발길질하고 경찰봉으로 내리쳤다. 그의 머리뼈 11군데가 금이 가고 다리가 부러지는가 하면 뇌가 손상되고 콩팥이 터졌다. 운전자 이름은 로드니 킹이었다.

경찰이 그를 폭행하는 장면은 요란한 순찰차 사이렌과 헬리콥터 소리에 잠이 깬 인근 주민의 비디오카메라에 고스란히 촬영됐고, LA-TV 채널5로 미국 전역에 방영됐다. 이를 본 시청자들은 경악했다. 조지 부시 대통령도 "구역질 나는 광경"이라고 비난했다. 백인 경찰들은 기소됐고 이들의 유죄는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였다.

2017년 4월 29일 미국 LA의 한인과 흑인 학생들이 LA 폭동 발발 25주년 평화대행진에 참가해 행진 준비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은 LA주 지방재판소에서 시작됐다가 변호인의 요청에 따라 LA 벤투라카운티 지방재판소로 이관됐다. 이곳 주민 88%가 백인이고 흑인 비율은 2%에 불과했다. 변호인 의도대로 배심원 12명은 백인 10명, 아시아계 1명, 중남미계 1명으로 구성됐다.

1992년 4월 29일 흑인이 포함되지 않은 배심원단이 '전원 무죄' 평결을 내리자 흑인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LA 흑인 거주지역 센트럴카운티에 몇몇 흑인이 "정의가 없으면 평화도 없다"고 적힌 피켓을 들고 행진한 것을 시작으로 시위가 일어났고 이는 폭동으로 비화했다. 5월 1일 비상사태 선포와 함께 주방위군 6천여 명과 연방군 1천여 명이 투입돼 진압할 때까지 3일간 55명이 사망하고 2천300여 명이 부상했다.

1992년 4월 29일 발발한 미국 LA 흑인 폭동 때 시위대가 상점을 약탈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백인 경찰의 인종차별적 태도에서 비롯된 흑인 폭동의 역사는 뿌리가 깊다. 1992년 LA 폭동의 발화점이 된 센트럴카운티는 1965년 와츠 폭동의 진원지이기도 하다. 백인 경찰이 흑인 집단거주지인 와츠지구에서 한 흑인 청년을 음주운전 혐의로 연행하려다가 용의자 어머니와 실랑이가 벌어졌다. 이를 지켜보던 군중이 웅성거리자 겁먹은 경찰이 권총을 뽑아 들었다. 이 행동은 동요를 진정시키기는 커녕 부채질해 성난 군중은 경찰에게 돌과 병을 던지며 항의하다가 폭동을 일으켰다. 8월 11일부터 6일간 34명이 숨지고 1천32명이 다쳤다.

1980년 5월 17일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 일어난 사건은 1992년 LA 폭동과 비슷하다. 백인 경찰 4명이 과속으로 오토바이를 몰던 흑인 아서 맥더피를 붙잡아 집단 구타해 사망에 이르게 했다. 그러나 백인으로만 구성된 배심원단의 결정으로 모두 무죄 방면되자 흑인 밀집 지역인 마이애미의 오버타운과 리버티시티에서 폭동이 발생했다. 주방위군 투입으로 진압했는데 사망자는 12명, 부상자는 165명이었다.

5월 30일 미국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조지 플로이드 사망에 항의하는 한 시위대가 총기로 무장한 채 전복된 경찰차 옆을 지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2001년 4월 7일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서는 19살의 비무장 흑인 청년 티머시 토머스가 경찰의 추격을 피해 도망치다 총에 맞아 절명했다. 이에 항의하는 흑인 군중이 백인 공격과 상가 약탈에 나서 1992년 이후 처음으로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야간 통행금지령이 내려졌다.

2009년 1월 1일 샌프란시스코 오클랜드 지하철역에서는 몸싸움을 진압하던 경찰이 비무장 흑인 청년 오스카 그랜트의 등에 총을 쏴 숨지게 했다. 당시 경찰의 과잉진압 장면을 담은 영상이 유튜브를 타고 삽시간에 퍼지며 폭동이 발발했다. 이듬해 11월 가해 경찰에게 2년 형이라는 비교적 가벼운 판결이 내려지자 폭력 시위가 재현됐다.

한국 거주 유색인종 외국인 모임인 BSSK(Brothas&Sistas of South Korea) 회원을 비롯한 외국인들이 2014년 12월 6일 서울 마포구 홍익대 정문 앞에서 미국 백인 경찰의 과잉진압에 희생된 마이클 브라운을 추모하고 인종차별 철폐를 요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2014년 7월 17일 뉴욕시에서 43세의 흑인 에릭 가너가 불법으로 담배를 팔다가 적발됐다. 체포 과정에서 백인 경찰관에게 목 조르기를 당한 그는 "숨을 못 쉬겠어"라는 말을 11차례 내뱉다가 의식을 잃었다. 경찰은 구급차가 올 때까지 약 7분간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아 가너는 목숨을 건지지 못했다. 목을 조른 경찰은 기소조차 되지 않았고 사건 발생 5년이 지난 뒤에야 파면됐다.

같은 해 11월 9일 미주리주 퍼거슨시에서는 18세 흑인 마이클 브라운이 거리에서 백인 경찰에게 총 6발을 맞았다. 그는 흉기를 소지하지 않았고 항복의 의미로 손을 들었는데도 사살됐다. 부검 결과 뒤에서 쏜 총알도 발견됐다. 시신이 한동안 도로에 방치된 모습이 찍혀 SNS(사회관계망서비스)로 퍼져 나가자 화가 난 흑인들이 항의 집회를 벌이다가 방화와 약탈을 감행했다.

5월 29일 미국 뉴욕 브루클린 지구에서 집회 참가자들이 '정의 없이 평화 없다' 등의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미국이 또다시 흑인 폭동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5월 25일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도로 바닥에 엎드린 46세의 비무장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 경찰의 무릎에 짓눌려 "숨을 못 쉬겠다"고 호소하다가 숨진 것이다. 현장을 지나던 행인이 이 장면을 촬영해 SNS에 올렸다. 경찰의 폭력을 규탄하는 항의 시위가 미국 전역에서 줄을 잇고 있고 무력 충돌, 방화, 차량 파손, 상점 약탈 등이 벌어지고 있다. 발발 원인은 6년 전 뉴욕의 가너 사건과 판박이다.

차별 금지를 명문화한 각종 인권법을 제정하고 흑인 대통령까지 배출했음에도 미국에서 흑백 갈등으로 인한 유혈 사태가 끊이지 않는 것은 백인들의 인종차별 의식이 워낙 뿌리가 깊은 데다 흑백 간에 사회·경제적 지위 차이가 여전하기 때문이다. SNS의 발달로 백인 경찰들의 가혹행위 장면이 생생하게 전파되는 것도 사태 빈발과 악화에 한몫하고 있다.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에 분노한 시위대가 5월 29일 새벽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불타는 한 식당 건물 앞에 모여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우리에게 흑인 폭동이 더욱더 우려스러운 것은 1992년 LA의 악몽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로드니 킹 사건 평결에 분통을 터뜨린 흑인들은 엉뚱하게도 한인 상점을 향해 화풀이해댔다. 악착같이 돈을 모아 자리를 잡아가던 한인 상인들은 흑인들에게 선망과 질시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 식료품점과 술집에서 각각 절도와 강도 행각을 벌이던 흑인이 잇따라 한인 주인에게 사살되는 일이 일어났는데, 모두 정당방위가 인정돼 집행유예로 마무리된 것도 불을 질렀다. 한국인 한 명이 숨지고 40여 명이 다쳤으며 한인 상점 1천600여 곳이 습격당했다. 피해액 7억 달러(약 8천666억 원) 가운데 4억 달러 가까운 손실이 한인타운에서 일어났다.

이번에도 재미동포에게 불똥이 튀었다. 지난달 28일 밤 미니애폴리스 일대의 한인 점포 5곳이 약탈·방화 피해를 본 것으로 나타났다. 1992년 LA처럼 폭도가 한인 상점을 표적으로 삼은 것은 아니지만 한인 점주들은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국의 각 재외공관은 인터넷 홈페이지, SNS, 안전문자 등을 통해 시위 현장 접근을 자제하고 신변 안전에 유의해 달라고 당부했다.

최강대국이자 민주국가·문명사회를 자처하는 미국이 지난 세기의 고질병을 치유하지 못한 채 신음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심경이 착잡하다. 다문화사회로 이행하는 우리도 반면교사로 삼아 차별로 인한 갈등을 줄이는 데 힘써야 한다. (한민족센터 고문)

연합뉴스 한민족센터 고문

hee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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