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하루도 잊어선 안 되는 인물' 헐버트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하루도 잊어선 안 되는 인물' 헐버트
  • 이희용
  • 승인 2019.08.01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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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의 글로벌시대] '하루도 잊어선 안 되는 인물' 헐버트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외국인'으로 불리는 미국인 독립운동가 호머 헐버트.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제공]

(서울=연합뉴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하고 자신의 조국보다 한국을 위해 헌신했던 빅토리아풍의 신사 헐버트 박사 이곳에 잠들다."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가 1995년 8월 5일 50주기를 맞아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세운 추모비의 글귀다. 바로 옆 묘비에는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도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고 새겨놓았다.

신복룡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장(왼쪽부터 세 번째) 등 각계 인사가 1999년 8월 5일 서울 양화진의 헐버트 박사 묘지에서 50주기 추모식과 묘비 제막식을 함께 열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오는 5일 70주기를 맞는 호머 헐버트는 1950년 외국인 최초로 건국훈장(독립장)이 추서된 독립운동가였고, 2014년 금관문화훈장을 받은 한글학자이자 역사연구가이자 문화운동가이자 교육자였다.

그는 1863년 미국 버몬트주 뉴헤이븐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미들베리대 총장을 지낸 목사였고 어머니는 다트머스대 창립자의 증손녀였다. 다트머스대를 졸업하고 유니언신학대를 수료한 뒤 1886년 육영공원 교사로 부임했다. 육영공원은 양반집 자제와 관리들에게 서양식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조선 정부가 세운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이다.

육영공원은 영어, 자연과학, 수학, 지리, 각국의 역사와 정치 등을 가르쳤다. 헐버트는 '양반과 평민 모두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이란 뜻으로 '사민필지'(士民必知)라는 한글 교재를 만들었다. 자연 현상의 원리, 인간의 출현과 이동, 각국의 지형·산업·정치·종교 등을 담았고 한문본과 국한문 혼용체로도 출간됐다.

2018년 8월 10일 서울 마포구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 내 선교100주년기념관에서 열린 헐버트 박사 69주기 추모식에서 참석자들이 헌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헐버트는 서양 학문을 가르치려고 우리말을 배우다가 한글의 우수성에 매료돼 한글을 연구했다. 1892년 1월 한국 최초의 영문 월간지인 '한국 소식'(The Korean Repository) 창간호에 '한국의 알파벳'이란 제목의 논문을 발표해 한글의 독창성, 과학성, 간편성을 알렸다. 3월호에는 한글의 창제 과정을 설명하는 글을 싣고 1898년 2월호에는 전문가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이두를 소개했다. 아래아(ㆍ)를 없애고 띄어쓰기를 도입하자고 주장하는 등 한글 맞춤법 정비에도 이바지했다.

그는 "한글과 견줄 문자는 어디에도 없다"면서 "조선이 한글 창제 직후부터 한글을 사용했더라면 큰 축복이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사민필지' 서문에는 "조선 언문이 중국 글자에 비해 크게 요긴하건만 사람들이 요긴한 줄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업신여기니 어찌 안타깝지 아니하리오"라고 썼다.

정홍원 국무총리가 2014년 10월 9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568회 한글날 경축식에서 호머 헐버트 박사를 대신해 증손자인 킴벌 헐버트 씨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도 관심이 많았다. 1901년부터 4년 동안 한국사에 관한 글을 자신이 창간한 영문잡지 '한국 평론'(Korea Review)에 연재하는가 하면 한자로 쓴 5권짜리 한국 역사책 '대동기년'을 1903년 중국에서 출간한 데 이어 최초의 영문 한국사도 1905년 미국에서 펴냈다.

1907년 황태자 순종의 결혼식 축하 사절로 참석한 일본의 궁내부대신 다나카 미쓰야키(田中光顯)가 개성 경천사 터에서 10층석탑을 무단으로 해체해 도쿄의 자기 집 뜰에 갖다 놓자 헐버트는 반출 현장 사진을 찍고 주민 증언을 수집해 일본 영어신문 '재팬 크로니클'에 폭로했다. 그러자 '뉴욕타임스' 등 해외 언론도 "야만적인 문화재 약탈"이라는 내용의 비판 기사를 실어 1918년 돌려받을 수 있었다.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경천사지 10층석탑과 헐버트 박사의 기고문이 실린 1907년 4월 4일 자 '재팬 크로니클'. [연합뉴스 자료사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제공]

민요 '아리랑'을 서양식 음계로 처음 채보한 인물도 헐버트다. 1896년 2월 '한국 소식'에 '문경새재 아리랑'과 함께 경기민요 '군밤타령', 시조 '청산아' 등의 악보를 실었다. 그는 "아리랑은 한국인에게 쌀과 같은 존재여서 언제 어디를 가든 들을 수 있다"면서 "한국인은 즉흥곡의 명수여서 완성된 곡이나 음계 없이도 노래를 잘 부른다"고 평했다.

헐버트는 1896년 4월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창간할 때도 인쇄시설과 관련 지식을 제공하고 사실상 편집인 역할을 했다. 영국 '더 타임스'와 미국 AP통신 객원 특파원으로도 활동하며 한국의 실상을 해외에 알렸다. 한성사범학교 교장, 관립중학교 교사 등으로 교육에 힘쓰는 한편 기독교청년회(YMCA) 준비위원장과 초대 회장을 맡아 청년운동과 체육 보급에도 앞장섰다.

경북 문경 옛길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세워진 문경새재 아리랑비. 헐버트 박사의 얼굴과 그가 그린 아리랑 악보가 새겨져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 직후 춘생문 사건에도 관여한 그는 1905년 10월 고종의 친서를 품고 미국 특사로 파견돼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역설했고, 11월 체결 뒤에는 "미국이 한국을 일본에 넘겼다"며 모국의 태도를 거세게 비난했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릴 때는 이상설·이준·이위종 특사와는 별개로 고종 밀사로 파견돼 각국 대표들에게 일제의 침략 야욕을 폭로했다.

일본에는 눈엣가시여서 1909년 사재 정리를 위해 잠시 한국에 들른 것 말고는 한국에 올 수 없었다. 미국에서도 순회 강연이나 기고 등을 통해 한국 독립을 주장하고 미국의 한국 정책을 비판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연방 상원 외교위원회에서 일제의 잔학성을 고발하기도 했다.

2015년 8월 12일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가 헤이그 밀사 파견에 관한 증언 등 헐버트 박사의 업적을 담은 기록을 공개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광복 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헐버트 박사가 기념식 단상에 있어야 한다"며 초청했으나 부인의 병세가 위중해 응할 수 없었다. 그해 겨울 부인이 숨진 뒤 1949년 다시 초대받자 노구를 이끌고 7월 29일 한국 땅을 밟았다. 그러나 배로 한 달가량 걸리는 여독을 이기지 못한 채 8월 6일 청량리 위생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40년 만의 방한 길은 그의 마지막 여행이 됐고,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미국 AP통신과의 출국 직전 인터뷰는 유언이 됐다. 8월 11일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사회장이 치러졌으며, 1897년 6살의 나이로 숨져 양화진에 먼저 묻혀 있던 아들 곁에 안장됐다.

부민관(옛 서울시민회관)에서 열린 헐버트 박사의 영결식을 소개한 1949년 8월 12일 자 동아일보 지면.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제공]

오는 9일 오전 11시 양화진 묘지에서는 김동진 회장을 비롯한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회원, 문희상 국회의장,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70주기 추모식이 열린다.

안중근 의사는 뤼순(旅順)감옥에서 일본 경찰이 헐버트에 관해 묻자 "한국인이라면 하루도 잊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라고 말했다. 하루라도 잊을 수 없는 인물을 우리는 너무 오래 잊고 지냈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렵다. 부끄럽고 죄송스럽지만 이날 하루만이라도 그의 발자취와 업적을 생각하면 어떨까.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해가 벌써 절반 넘게 지나가고 있다. (한민족센터 고문)

hee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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