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탄생 140주년 '조선의 테레사' 셰핑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탄생 140주년 '조선의 테레사' 셰핑
  • 이희용
  • 승인 2020.09.2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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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의 글로벌시대] 탄생 140주년 '조선의 테레사' 셰핑

'한국 간호사의 어머니'이자 '조선의 마더 테레사'로 불린 셰핑(서서평) 선교사.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조선에서 500명이 넘는 여성을 만났는데, 제대로 이름 가진 이는 10명도 안 됐습니다. 이들은 '돼지 할머니', '개똥 엄마', '큰년', '작은년' 등으로 불립니다. 남편에게 노예처럼 복종하고 집안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아들 못 낳는다고 소박맞고, 남편의 외도로 쫓겨나고, 가난 때문에 팔려 가기도 합니다. 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한글을 깨우쳐주는 것이 큰 기쁨입니다."

독일 출신의 미국 남장로회 간호선교사 엘리자베스 요한나 셰핑(한국명 서서평·徐舒平)이 1921년 미국 테네시주 내슈빌 선교부에 보낸 편지의 한 대목이다. 일제강점기 조선 여성들의 비참한 현실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어 오갈 데 없는 여성들을 보살피고 학교를 세우고 인권 옹호에 앞장서 '조선의 마더 테레사', '조선의 작은 예수'란 별칭을 얻었다.

젊은 시절의 셰핑 선교사.

셰핑은 1880년 9월 26일 독일 비스바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가 한 살 때 숨졌다고도 하고, 셰핑이 사생아였다는 설도 있다. 어머니는 3살 때 그를 친정어머니한테 맡기고 미국에 이민했다. 9살 때 외할머니가 사망하자 주소 적힌 쪽지 한 장 들고 어머니를 찾아 미국으로 건너갔다.

다행히 어머니를 만나 뉴욕에서 중고교와 간호전문학교를 다녔다. 졸업을 앞두고 뉴욕시립병원에서 실습하다가 동료의 권유를 받고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개종했다. 낮엔 간호사로 일하고 밤엔 신학교를 다닌 뒤 선교단체가 운영하는 유대인 결핵요양소와 이탈리아 이민자수용소 등에서 봉사했다. 조선에 간호사가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미국 남장로회 해외선교부에 들어가 1912년 2월 20일 조선 땅을 밟았다.

1905년 설립된 광주제중원 모습. 광주기독병원의 전신이다.

처음 부임한 곳은 광주기독병원의 모태가 된 광주제중원이었다. 이곳의 2대 원장인 로버트 윌슨(한국명 우월순)을 도와 환자들을 돌보는 한편 간호사들을 통솔하고 훈련시켰다. 군산의 구암예수병원과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도 일했다.

1919년 3·1운동 때는 서울에 있었다. 부상자를 돕고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최흥종을 뒷바라지했다. 광주제중원에서 일하며 셰핑과 인연을 맺은 최흥종은 나중에 목사가 돼 사회사업에 헌신했다. 셰핑을 못마땅하게 여긴 일제는 서울 활동을 금지하는 바람에 그는 다시 광주로 내려갔다.

1918년 세브란스 간호사양성소(연세대 간호대 전신) 졸업식 장면. 맨 오른쪽이 세브란스병원을 세운 에이비슨 원장이고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셰핑 선교사다.

셰핑의 업적 가운데 으뜸으로 꼽히는 것은 간호사들을 길러내고 간호사 모임을 조직한 것이다. '한국 간호사의 어머니'로도 불린다. 1923년 4월 대한간호협회 전신인 조선간호부회를 결성해 10년간 회장을 맡고 '간호교과서', '실용간호학', '간호요강', '간이위생법' 등의 교재를 펴냈다. '간호사업사' 등 외국 서적도 우리말로 번역했다. 그는 조선간호부회를 국제간호협회에 가입시키려고 캐나다 몬트리올과 일본 도쿄(東京) 총회에 참가해 연설하는 등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한센병 환자들의 인권 보호와 치료에도 앞장섰다. 윌슨 원장이 광주제중원에 차린 한센병진료소와 여수 애양원에서 환자들을 보살피는 한편 최흥종 목사와 함께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강제 불임수술 정책에 반대하고 이들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해줄 것을 요구했다. 1933년에는 환자 500여 명과 함께 서울의 조선총독부로 행진을 벌여 이듬해 고흥군 소록도에 대규모 요양시설과 자활시설이 들어서도록 했다.

1933년 광주 이일학교 좋업식 사진. 맨 뒷줄 가운데가 셰핑 선교사다. [한일장신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셰핑은 여성 계몽운동에도 헌신했다. 1922년 6월 2일 자기 집 좁은 방에 배움의 때를 놓친 여성들을 모아놓고 가르쳤다. 이것이 전도부인양성학교의 시작으로 이듬해 국내 최초의 여성신학교로 발전했다. 1926년에는 미국의 친구 로이스 닐의 도움을 얻어 광주광역시 양림동에 건물을 짓고 후원자 이름을 따 이일(李一)학교로 명명했다. 1961년 전주의 한예정성경학교와 합병하며 두 학교 이름을 한 글자씩 따서 한일장신대가 됐다.

광주 양림산에 뽕나무밭을 가꾸고 여성 자립을 위한 양잠, 직조, 자수 기술 등을 가르치는가 하면 이를 통해 만든 손수건과 탁자보 등을 미국에 팔아 이일학교 학생들의 학비로 썼다. 부인조력회 등 여성단체를 결성해 여성운동가들을 길러내고 인신매매와 축첩 반대, 공창 폐지 운동도 펼쳤다.

셰핑은 평생 독신으로 지내며 불쌍한 아이를 보면 집으로 데려와 씻기고 먹였다. 버려진 아이 14명을 양자로 삼았는데, 한센병 환자도 한 명 있었다. 과부나 소박맞은 여인도 38명이나 집으로 데려와 함께 지냈다. 늘 흰 저고리 검정 치마에 남성용 고무신 차림이었고 보리밥과 된장국을 좋아했다.

흰 저고리 검정 치마 차림으로 아기를 업고 있는 셰핑 선교사.

1934년 6월 28일 만성흡수불량증으로 세상을 떠나며 시신까지 의학실습용으로 기증했다. 그때만 해도 시신 기증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남긴 재산은 동전 7닢, 옥수숫가루 두 홉, 담요 반 장뿐이었다. 나머지 반 장은 더 가난한 이에게 찢어서 준 것이었다. 침대맡에는 그의 좌우명인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NOT SUCCESS, BUT SERVICE)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장례식은 7월 7일 광주 최초의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이일학교 학생들이 운구하고 소복 차림 여인들이 뒤를 따랐다. 한센병 환자와 걸인들은 "어머니"를 외치며 목놓아 울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사설에 "백만장자 못지않은 집에 편히 앉아서 하인을 두고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어떤 선교사들의 귀에 셰핑의 일생은 어떻게 울릴까?"라고 썼다. 미국 남장로회 해외선교부는 1930년대 전 세계에 파송된 선교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선교사 7인'을 선정하며 한국 선교사로는 유일하게 서서평을 포함했다.

셰핑 선교사의 일대기를 담은 2017년 개봉 영화 '서서평-천천히 평온하게' 포스터. [연합뉴스 자료사진]

셰핑의 조선 사역 100주년인 2012년과 타계 80주년인 2014년에 그의 일대기를 담은 전기, 뮤지컬, 연극, 학술세미나 등이 선보이고 2017년에 영화도 개봉했으나 아직도 그의 존재를 모르는 이가 많다. 셰핑의 탄생 140주년을 맞아 그의 헌신과 봉사를 기억하고 그를 본받는 사람이 늘어나길 기대한다.

1928년 5월 평양 조선간호부회 총회에서 셰핑이 한 연설은 1세기가 지난 오늘날 울림이 더 크게 느껴진다. "남을 불쌍히 여기는 사랑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제아무리 십자가를 드높이 치켜들고 목이 터질 만큼 예수를 부르짖어도 불쌍한 사람을 돕지 않으면 참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hee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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