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결초보은' 우리나라 정부의 유네스코 가입 70년사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결초보은' 우리나라 정부의 유네스코 가입 70년사
  • 이희용
  • 승인 2020.06.08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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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의 글로벌시대] '결초보은' 우리나라 정부의 유네스코 가입 70년사

2012년 11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유네스코에 기증한 1956년판 초등학교 4학년 2학기 자연 교과서가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 로비에 전시돼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프랑스 파리의 유네스코(UNESCO·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 본부 건물 로비에 들어서면 낡은 우리나라 초등학교 교과서 한 권이 전시돼 있다. 표지에 '자연'과 '4-2'라는 글씨 아래 남녀 어린이 2명이 천체망원경으로 밤하늘 별을 관측하는 모습이 담겨 있고, 뒤표지 안쪽에는 "금번에 유네스코와 운크라에서 인쇄기계의 기증을 받아 국정교과서 인쇄전속공장이 새로 생긴 바, 이 책은 그 공장에서 박은 것이다"란 문교부 장관 명의의 공지문이 적혀 있다.

1956년판 4학년 2학기용 자연 교과서는 2012년 11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유네스코를 방문해 기증한 것이다. 1944년생인 그는 6·25 전쟁통과 전후 혼란기에 초등학교를 다니며 유네스코와 운크라(UNKRA·유엔한국재건단) 도움으로 인쇄한 교과서로 공부했다. 반 총장은 "우리가 이 책으로 공부했기에 오늘날의 한국이 있다"고 말했다.

프랑스 파리의 유네스코 본부 건물 전경. 우리나라는 오는 14일 유네스코 가입 70주년을 맞는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2차대전 후 연합국을 비롯한 각국은 평화 체제를 구축하고자 1945년 10월 24일 유엔(국제연합)을 창설하고 안전보장이사회·경제사회이사회·국제사법재판소 등을 두는 한편 산하 전문기구를 발족했다. 이 가운데 하나가 전쟁을 막으려면 상호 이해와 지적 연대를 추구해야 한다는 자각에서 탄생한 유네스코다. 1946년 11월 4일 정식 출범에 앞서 1945년 11월 16일 채택한 유네스코 헌장 서문에는 그 정신이 잘 드러나 있다.

"전쟁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평화의 방벽을 세워야 할 곳도 인간의 마음속이다. 서로의 풍습과 생활의 무지는 인류 역사상 세계 국민들 사이에 의혹과 불신을 초래한 공통적인 원인이며, 이 의혹과 불신 때문에 그들의 불일치가 너무나 자주 전쟁을 일으켰다. (중략) 정치적·경제적 조정에만 기초를 둔 평화는 세계 국민들의 일치되고 영속적이고 성실한 지지를 확보할 수 있는 평화가 아니다. 평화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인류의 지적·도덕적 연대 위에 평화를 건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

2010년 5월 24일 서울 명동 유네스코회관에서 열린 '한국 유네스코 가입 60주년 기념식'에서 이리나 보코바 유네스코 사무총장이 축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1948년 12월 12일 유엔 총회에서 합법정부로 인정받은 대한민국은 유네스코 가입을 서둘렀다. 국제사회의 협력과 선진국의 교육·과학기술 지원을 끌어내는 것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대통령 특사 겸 유엔 한국대표단장 조병옥은 1949년 7월 5일 주미 유엔 연락관에게 유네스코 가입 신청서를 제출했다.

유엔 비회원국은 유엔 경제사회이사회 심의를 거쳐야 하므로 가입안은 1950년 2월 8일 경제사회이사회에서 통과된 뒤 5월 22일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개막한 제5차 유네스코 총회에서 확정됐다. 한국은 6월 14일 자로 55번째 유네스코 회원국이 됐다. 옵서버로 총회에 참석한 공진항 주프랑스 공사는 연단에 올라 회원국 대표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1954년 1월 30일 서울대 강당에서 열린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창립총회.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제공]

유네스코 헌장에 따르면 회원국은 정부와 민간 대표로 구성된 국가위원회를 설치해야 한다. 그러나 11일 만에 6·25 전쟁이 터져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는 1953년 7월 6일 '한국유네스코위원회 설치령'이 공포된 뒤 이듬해 1월 30일 출범했다. 초대 위원장과 사무총장으로 김법린 문교부 장관과 정대위 박사가 각각 취임했다. '유네스코 활동에 관한 법률'은 1963년 4월 27일 공포됐다.

굼뜬 한국의 행보와 달리 유네스코 본부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1950년 집행이사회와 이듬해 총회에서 초등학교용 교과서 인쇄시설 건립을 위해 한국에 미화 10만 달러(현재 가치 약 454억 원)를 긴급 지원하기로 결의했다. 운크라는 14만 달러를 냈다. 피난지에서도 천막 교실을 세워 학교 수업을 이어갈 만큼 교육열은 높은데 교과서가 모자라 애를 태운다는 소식을 접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1954년 9월 16일 서울 대방동에서 대한문교서적 인쇄공장 준공식이 열리고 있다. 이 공장은 고속윤전기·자동활판기·활자제조기·사진식자기 등 최신 장비를 갖춰 연간 3천만 부를 찍어낼 수 있었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제공]

착공 1년 만인 1954년 9월 16일 서울 영등포구(지금은 동작구) 대방동에 최신식 대한문교서적 인쇄공장이 들어섰다. 1년에 3천만 부를 찍어낼 수 있는 규모였다. 대한문교서적은 국정교과서㈜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96년 대한교과서㈜에 인수돼 이듬해 합병됐고, 대한교과서는 2011년 ㈜미래엔으로 개명했다.

유네스코는 1952년 교육사절단을 파견해 실태를 조사한 뒤 108개 항목의 건의안을 한국 정부에 제출해 교육 재건의 청사진을 만드는가 하면 1956년과 1957년 각각 30만 달러와 22만 달러를 들여 신생활교육원과 한국외국어학원을 개설했다. 1967년 2월 17일 준공돼 1980년대까지 서울 중구 명동의 랜드마크 구실을 한 유네스코회관도 유네스코 본부와 한국 정부가 힘을 합쳐 세운 것이다. 우리나라 고도성장의 비결로 교육을 꼽는 이가 많은데, 유네스코에 큰 빚을 진 셈이다.

1956년 경기도 수원시 서울대 농과대학 캠퍼스에 들어선 유네스코 신생활교육원에서 훈련생들이 선진 농법을 배우고 있다. 신생활교육원은 1959년 한국 정부에 이관돼 농촌지도자훈련원·농업연수부 등을 거쳐 농식품공무원교육원이란 이름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제공]

한국은 유네스코 도움받은 값을 톡톡히 하고도 남는 모범국이다. 비문해(非文解·문맹) 퇴치를 위해 교육 시설·교재를 지원하고 교사를 훈련하는 '브릿지 프로그램' 보급에 앞장서는가 하면 2000년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 국제이해교육원을 세워 국제이해운동과 세계시민교육을 주도해왔다. 교과서 인쇄공장을 지어준 것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2000년대 북한에 교과서 인쇄기와 인쇄용지를 지원하기도 했다.

이밖에 세계유산 보호운동, 생물권 보전운동, 창의도시 네트워크 사업, 문화다양성 협약 등 유네스코 활동에도 중추적 역할을 해왔다. 유네스코가 비문해 퇴치에 기여한 단체에 주는 상이 세종상이고, 기록유산 보존에 힘쓴 단체에는 직지상을 시상하고 있으니 한국의 위상을 짐작할 만하다. 우리나라가 유네스코 본부에 내는 분담금 순위는 2018년 13위에서 2019년 10위로 올라섰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가 2009년 10일 인천항에서 북한 초등학교용 교과서 인쇄용지 220t을 실어 보내는 출항식을 열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유네스코 한국위는 6월 14일 유네스코 가입 70주년을 맞아 지난해 슬로건 공모 최우수작으로 '평화를 심다, 세계를 품다'를 뽑는 등 다채로운 기념행사를 준비해왔다. 그러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기념식, 국제회의, 포럼 등 대면 행사를 모두 취소했다. 7∼8월 서울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려던 기념 전시회도 개최여부가 불투명한 형편이다. 청소년 영상 온라인 공모전과 유네스코 로고 찾기 캠페인을 계획대로 진행하고 있고, 10월 말 '유네스코 글로벌 미디어·정보 리터러시 주간' 대표 회의와 청년 포럼을 올해 처음 한국위 주관으로 개최할 예정이다.

코로나19 사태로 유네스코 헌장 서문의 정신이 갈수록 퇴색하는 느낌이다. 국가 간 장벽은 높아지고 정치·경제적 이해에 따른 갈등도 깊어지고 있다. 그래도 마음속에 평화의 울타리를 세우고 지적·도덕적 연대를 구축하는 일은 포기할 수 없다. 그것이 204개 유네스코 회원국의 약속이고 인류의 다짐이다. (한민족센터 고문)

이희용 연합뉴스 한민족센터 고문

hee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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