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노동자의 집]② '사장님' 드나드는 외딴 숙소 성범죄에 무방비
[이주노동자의 집]② '사장님' 드나드는 외딴 숙소 성범죄에 무방비
  • 홍덕화
  • 승인 2020.05.1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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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의 집]② '사장님' 드나드는 외딴 숙소 성범죄에 무방비

(서울=연합뉴스) 탐사보도팀 = 광주전남지역 캄보디아 공동체에서 만난 20대 여성 이주노동자 레악카나(가명) 씨는 "샤워를 하는데 (남자) 사장님이 문을 열고 들어온 적도 있어요"라고 놀랐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가 전라북도 익산의 상추농장 컨테이너 숙소에 살 때 겪은 끔찍한 경험이다.

사업주는 시설을 살피고 노동자를 관리한다는 이유로 사업장 내 또는 인근에 있는 이주노동자 숙소에 수시로 드나든다. 언제든 누군가 들이닥칠 수 있는 외딴곳의 '열린 숙소'는 일터의 긴장을 쉼터로 끌어들인다. 그래서 그들은 숙소에서도 편히 쉬지 못하고 항상 불안하다.

경기도 여주시의 한 사업장에서는 지난 2017년 실제로 성추행 사례가 있었다.

여성 이주 노동자들의 숙소를 드나들던 한국인 남성 관리자는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는 여성에게 "오빠한테 뭐야 이게, 한국에서 어떻게 하는 줄 아냐"며 여성 노동자를 강제로 쓰러뜨린 뒤 엉덩이를 때리기도 했다.

단비뉴스 취재진은 "남성 관리자는 여성 노동자 숙소에 거리낌 없이 들어가 성추행까지 했고, 해당 사업장에서는 이후 임금 체불 문제 발생 사실도 확인했다"고 전했다.

광주전남캄보디아공동체의 쉼터
캄보디아 국적의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쉼터인 광주전남캄보디아공동체 쉼터. [사진 = 단비뉴스 특별취재팀 홍석희]

비정부기구(NGO) '지구인의 정류장'의 김이찬 대표는 성추행·성희롱 피해 여성이 몰래 촬영한 영상을 취재진에게 확인시켜줬다.

영상 속 관리자는 "짐 다 싸, 너희들 월급 주고 캄보디아 보낼 거야"라고 협박했다.

고용허가제의 맹점이 성범죄를 부추기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고용허가제로 입국한 외국인 이주노동자의 체류 자격 유지 여부가 전적으로 사업주에게 달려있기 때문에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당해도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김이찬 대표는 "사업장에서 나가면 미등록(불법체류)이 될 수밖에 없다"며 "(따라서 사업주와 이주노동자 사이엔) 불평등한 권력 관계가 나타난다"고 말했다.

실제로 영상 속 피해 노동자는 2017년 비자 만료로 본국으로 돌아갔고 가해 남성 관리자는 처벌받지 않았다.

외부인과의 접촉이 뜸한 사업장과 숙소의 위치도 여성 이주 노동자들을 불안하게 하는 요인이다. 남성 노동자들 역시 혼자 있는 곳에 외부인이 마음대로 드나든다면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지난 2월 8일 전남 여수시 연등동 소재 여수 이주민센터에서 단비뉴스 취재팀과 만난 스리랑카 이주노동자 만다르(가명·남) 씨는 가두리 양식장 위의 숙소에 자주 드나드는 사장 때문에 불안감을 느꼈다고 한다. 사업주는 음식 재료를 가져다준다며 만다르 씨가 홀로 있는 가두리 양식장 숙소를 들락날락했고, 양식장에서도 수시로 마주쳤다고 한다.

"눈 뜨면 일터인 곳인 바닷가 이주노동자의 집"
전남 여수시 남면 섬에서 가두리 양식장에 배를 댄 채 먹이를 주는 이주노동자. 창문이 두 개 있는 컨테이너 숙소도 오른쪽에 보인다. [사진 = 단비뉴스 특별취재팀 최유진]

2016년 12월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이주여성 농업노동자 성폭력 실태조사 결과 보고회'에서는 농업 여성 이주노동자 202명 중 12.4%가 강간, 강제추행, 성희롱 등 성폭력 피해를 경험했다는 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다른 사람의 피해 사례를 들었다는 응답 비율은 36.2%에 달했다.

같은 해 국가인권위원회가 제조업 여성 이주노동자 38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제조업 분야 여성 이주노동자 인권상황 실태조사'에서도 응답자의 11.7%가 '성희롱이나 성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국제노동기구(ILO)는 '노동자 주택 권고(Workers' Housing Recommendation)'에서 사업주가 이주노동자에게 직접 숙소를 제공하는 방식이 '일반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주노동자가 지역사회와 차단되고, 사업장에 종속되거나 통제받는 상황에 놓일 수 있고, 일하는 사업장이 사적 공간인 숙소와 구분되지 않으면 노동자가 신체적·정신적 스트레스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이주여성 농업 노동자의 성폭력 피해 경험 응답
(서울=연합뉴스) 이주여성 노동자는 성폭력 피해에 대응하기 어렵다. 일터가 읍내나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의사소통도 원활하지 않아 외부에 도움을 요청하기 쉽지 않다.<<자료 출처: 이주여성 농업노동자 성폭력 실태조사 결과 보고서>> 2020.5.11

여성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내 성폭행 피해 문제가 불거지자 노동부는 2019년 1월 '사업장 변경 사유 고시'를 개정했다. 개정된 고시는 이주노동자가 사업장 내 성폭행 피해로 근로를 계속할 수 없다고 인정되는 경우에 사업장 변경을 허용할 수 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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