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뒤낭의 꿈과 세계적십자의 날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뒤낭의 꿈과 세계적십자의 날
  • 이희용
  • 승인 2019.05.02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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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의 글로벌시대] 뒤낭의 꿈과 세계적십자의 날

적십자 운동의 창시자 앙리 뒤낭.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지금으로부터 160년 전인 1859년 6월, 스위스의 청년 사업가 앙리 뒤낭(1828∼1910)은 알제리에 세운 제분회사가 자금난에 시달리자 도움을 요청하러 알제리를 식민통치하던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를 찾아갔다. 그러나 나폴레옹 3세는 북이탈리아 전선에서 오스트리아와 격전을 치르는 중이어서 만나지 못했다.

돌아오는 길에 솔페리노에서 죽어가는 부상병들을 보고 마을 주민들을 모아 긴급구호에 나섰다. 교회에 임시 병원을 설치해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군을 치료했다. 그는 이때 목격한 참상을 토대로 1862년 11월에 펴낸 책 '솔페리노의 회상'에서 이렇게 털어놓았다. "만일 국제구호단체가 존재하고 자원봉사 간호사들이 있었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을까."

1864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체결된 적십자 조약 협정문. [연합뉴스 자료사진]

뒤낭은 전시에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돕는 중립적인 민간 봉사단체를 만들고 이 단체 요원들의 활동을 보장하는 국제조약을 체결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뒤낭을 비롯한 5명의 위원으로 1863년 국제적십자위원회(ICRC·International committee of the Red Cross)가 창설된 데 이어 이듬해 10월 29일 유럽 16개국 대표가 스위스 제네바에 모여 '전지(戰地)에 있는 군대의 부상자 및 병자의 상태 개선에 관한 조약'을 체결했다.

골자는 "무기를 버리고 전투행위를 중지한 부상자와 병자는 인종·성별·종교·정치적 이념이나 다른 기준에 근거를 둔 차별 없이 인도적으로 대우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부상병 호송 차량과 야전병원은 중립시설로 간주해 공격하지 않고, 적군을 간호했다는 이유로 박해받지 않는다는 조항도 있다. 적십자조약(제네바협약)은 두 차례 세계대전을 거치며 일부 개정됐고 '해상에 있는 군대의 부상자·병자·난선자의 상태 개선에 관한 조약', '포로 대우에 관한 조약', '전시 민간인 보호에 관한 조약'이 추가됐다.

2016년 시리아 알레포에서 무력 충돌이 일어나 수만 명의 피란민이 발생하자 국제적십자위원회(ICRC)와 시리아 적신월사 의료진이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있다. [국제적십자위원회 제공]

뒤낭은 적십자 운동을 주도한 공로로 1901년 제1회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ICRC와 1919년 설립된 국제적십자사연맹(IFRC)은 1948년 그의 생일인 5월 8일을 세계적십자의 날로 제정하고 해마다 기념행사를 펼치고 있다. 현재 IFRC 회원국은 187개국이다.

우리나라는 대한제국 시절인 1903년 1월 8일 적십자조약에 가입하고 1905년 10월 27일 고종 황제 칙령에 따라 대한적십자사가 창설됐다. 초대 명예총재는 고종이고 사도세자 후손인 의양군 이재각에 이어 순종의 이복동생인 의친왕 이강이 차례로 총재를 맡았다. 그러나 1909년 일본적십자사에 강제합병됐다가 1919년 임시정부 수립 후 대한적십자회를 발족했으며 1949년 정식으로 재건됐다. IFRC에는 1955년 74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사할린 동포 1세들이 2015년 12월 14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영주귀국하며 태극기와 적십자기를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흰 바탕에 붉은색 십자가를 새겨넣은 적십자 깃발은 뒤낭의 모국이자 적십자조약 탄생에 큰 도움을 준 스위스 연방정부에 감사를 나타내고자 스위스 국기의 색깔을 거꾸로 한 것이다. 중국과 대만은 적십자가 아닌 홍십자(紅十字)라고 부른다.

이 마크는 초창기부터 논란을 빚었다. 이슬람 국가들은 11∼13세기 유럽 가톨릭 국가들이 중동을 침공한 십자군 전쟁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1876년 터키의 '오토만 부상자 구호협회'(터키 적신월사의 전신)는 러시아와 전쟁을 벌일 때 적십자 대신 붉은 초승달을 새긴 적신월(赤新月·Red Crescent) 깃발을 사용했고 이슬람권으로 퍼졌다. 1929년 ICRC가 공인해 53개국이 쓰고 있다.

왼쪽부터 적십자, 적신월, 적수정 마크.

이스라엘은 1948년 건국 이듬해부터 다윗의 육각형 별을 독자적으로 써오다가 2005년 ICRC 승인을 얻어 적수정(赤水晶·Red Crystal)을 사용하고 있다. 그해 ICRC는 "적십자·적신월·적수정 표장에 아무런 종교적·문화적·정치적 함의가 없다"는 내용의 추가의정서를 채택했다. 이슬람 시아파의 종주국인 이란은 적사자태양 문양을 쓰다가 1979년 호메이니의 혁명 후 적신월로 대체했다.

왼쪽은 이스라엘의 붉은 육각성, 오른쪽은 이란의 적사자태양 마크.

적십자는 두 차례 세계대전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1차대전 때 적십자 단원들이 포로수용소까지 찾아가 부상병들을 치료하자 전쟁포로에 대한 인권침해 사례도 줄었다. 2차대전 때는 포로들의 편지를 고향의 가족에게 전해주기도 했다. ICRC는 1917년과 1944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창설 100주년을 맞은 1963년에도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3회(뒤낭을 포함하면 4회) 노벨상 수상은 최다 기록이다. ICRC와 IFRC는 전시뿐만 아니라 각종 재난재해 발생 시 긴급구호 사업, 저개발국을 대상으로 한 보건복지 활동, 청소년 사업 등도 펼치고 있다.

남북 적십자 대표들이 1971년 9월 20일 판문점에서 예비회담을 열어 협력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행정자치부 제공]

대한적십자사는 임시정부 시절 독립군과 재외동포를 위한 인도적 활동을 벌인 것을 시작으로 한국전쟁, KNA 여객기 납북, 사라호 태풍, 4·19혁명, 광주민주화운동,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회점 붕괴, 대구 지하철 화재, 태안 기름 유출, 강릉 산불, 포항 지진 등의 현장에서 인명 구조와 긴급 지원에 나섰다.

1971년부터는 북한적십자사와 회담을 열어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개최하는가 하면 일본적십자사와 협력해 사할린 동포 영주귀국 사업을 벌였다. 부산 난민보호소를 만들어 베트남 보트피플을 수용하는 등 북한과 해외 이재민과 난민에게도 도움의 손길을 뻗치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적십자회비 납부를 독려하는 포스터가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도 대룡시장에 붙어 있다.

그러나 총재(2016년부터 회장으로 개칭) 선임 과정에서 정치적 논란이 일기도 했고, 혈액 관리나 재해 성금을 둘러싸고 비리 의혹에 휩싸인 적도 있었다. 적십자회비가 자율적으로 내는 국민 성금인데도 가구마다 지로용지가 발송되니 공공요금으로 오해해 불만을 털어놓는 시민도 적지 않다. 대한적십자사는 인터넷 홈페이지에 후원금·성금 납부자(442만 명·이하 2017년 기준), 모금액(1천28억 원), 도움받은 사람(160만 명) 등의 명세를 공개하고 있다.

IFRC는 지난달 30일 발간한 보고서에서 "북한이 오랜 가뭄으로 심각한 식량 부족에 시달려 북한적십자사가 재난구호긴급기금을 요청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면서 "현황 파악과 대응책 마련을 위해 IFRC가 6∼9일 북한을 방문해 조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제72회 세계적십자의 날을 전후해 펼쳐질 IFRC의 북한 돕기 활동이 남북 화해와 국제 평화를 이끄는 마중물이 되기를 기대한다. (한민족센터 고문)

hee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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