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100년 맞은 프랑스 한인 이민사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100년 맞은 프랑스 한인 이민사
  • 이희용
  • 승인 2019.11.19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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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의 글로벌시대] 100년 맞은 프랑스 한인 이민사

한인 노동자들을 동원해 조성한 프랑스 쉬프의 1차대전 전사자 공동묘지. [이장규 씨 제공]

(서울=연합뉴스) 일제의 수탈과 박해를 피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넌 한인 가운데 500여 명은 1913년 중국 만주나 러시아 연해주에서 1만㎞ 넘게 떨어진 러시아 서부 최북단 무르만스크에 발을 디뎠다. 이들은 철도 부설 공사장에서 6년여 동안 고된 노역을 한 뒤 1차대전 직후 일본으로 강제송환될 처지에 놓였다. 러시아 혁명과 내전에 개입해 이 곳을 점령한 영국이 동맹국인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무르만스크 한인 노동자 200여 명은 1919년 10월 12일 귀환하는 영국군을 따라 산타엘라나호를 타고 영국 에든버러에 도착했다. 이 소식을 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서기장 황기환은 일본 송환을 막기 위해 현지로 달려갔다. TV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주인공 유진 초이(이병헌 분)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그는 영국 관계자들에게 거세게 항의하고 프랑스 당국자에게도 간청해 일부를 프랑스로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르아브르항을 거쳐 파리에 도착한 인원은 37명이었다. 프랑스 노동부는 11월 19일 파리에서 동쪽으로 200㎞ 떨어진 소도시 쉬프의 철도 복구공사와 묘지 조성 사업에 투입했다. 프랑스는 물론 유럽 이주 한인의 1세대인 이들은 쉬프에서 재법한국민회를 결성했다. 당시에는 프랑스를 불란서(佛蘭西) 대신 법국(法國)이라고 불렀다. 프랑스한인회는 재법한국민회를 모태로 삼고 있다. 19일은 재법한국민회 출범 100주년 기념일이다.

TV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주인공 유진 초이 역을 맡은 이병헌(왼쪽)과 극중 인물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독립운동가 황기환. [tvN·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제공]

이들이 도착하기 전에도 프랑스에 거주한 한국인이 있었다. 기록상으로는 홍종우가 최초다. 1886년 조불수호조약 체결 때 비서관으로 참여했다가 1890년 12월부터 3년간 프랑스에 머물며 '춘향전' 번안을 돕고 한국역사를 강연했다. 궁중 무희 리심(리진)은 1891년 6월 초대 주한 프랑스 대리공사 플랑시의 귀국길에 동행해 결혼했다. 이를 모티브로 신경숙과 김탁환은 각각 소설 '리진'과 '파리의 조선 궁녀 리심'을 펴냈다.

외교관으로는 프랑스·러시아·오스트리아 겸임 공사로 임명된 이범진이 1900년 4월 처음 프랑스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했고, 뒤이어 민영찬이 대한제국 대표단장으로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가했다. 민영찬은 김만수에 이어 1902년 4월 프랑스 공사를 맡아 1905년 11월 을사늑약으로 일본에 외교권을 빼앗길 때까지 재임했다. 프랑스 최초의 유학생은 이범진의 아들 이위종이다. 프랑스 명문 장송드사이고교와 생시르육군사관학교를 각각 졸업하고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로 활약했다.

1918년 11월 1차대전의 총성이 멎고 이듬해 1월부터 파리에서 전후 체제를 논의하기 위한 강화회의가 열리자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대표를 파견해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열강에 알리고자 했다. 3월 13일 김규식이 가장 먼저 파리에 도착해 한국대표관을 개설해 외교 활동에 나섰다.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출범 후에는 한국대표관을 임시정부 파리위원부로 개칭하고 이관용과 황기환을 각각 부위원장과 서기장에 임명했다.

재법한국민회가 1920년 3월 1일 프랑스 쉬프에서 개최한 3·1운동 1주년 기념식. 프랑스 유학생 나기호의 회고록 '비바람이 몰아쳐도'(1982·양서각)에 수록된 사진이다.

황기환의 도움으로 프랑스에 정착한 한인 노동자들은 처음부터 임정 활동에 협조적이었다. 홍재하 초대 재법한국민회징을 중심으로 매달 급료의 일부를 파리위원부에 기탁했으며, 1920년 유럽 각지의 한인을 초청해 3·1절 기념식을 열었다. 1920년 1월 프랑스에 도착한 허정·나기하 등 유학생들도 가세했다. 하원의원 루이 마랭은 1921년 6월 한국친우회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지원한 공로를 인정받아 프랑스인으로서는 유일하게 건국훈장(애국장)을 받았다.

그러나 이듬해 황기환이 미국으로 떠나고 파리위원부가 사실상 활동을 종료하면서 임정과의 연결 통로는 끊기고 말았다. 그래도 홍재하를 비롯한 한인들은 광복의 꿈을 포기하지 않은 채 독립운동을 이어갔고, 재법한국민회는 파리한인친목회·재법한인회로 이름을 바꾸며 프랑스 한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프랑스한인회와 재외동포재단이 올해 펴낸 '프랑스 한인 100년사-꼬레앙 100년의 항해' 표지. [프랑스한인회 제공]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프랑스는 유엔, 미국, 영국에 이어 4번째로 1949년 2월 15일 정식 승인했다. 일제강점기 유럽에서 처음 한인의 정착을 허용했던 프랑스는 광복 후에도 유학생을 시작으로 한국인을 받아들였다. 프랑스는 미국 다음으로 많은 한국인 아이를 입양했다.

2018년 말 기준으로 프랑스에 거주하는 재외동포는 2만9천167명으로 전 세계에서 15번째로 많다. 유럽에서는 러시아, 독일, 영국에 이어 4위에 해당한다. 외국 국적자는 1만2천397명이고, 영주권자(3천105명), 일반체류자(6천717명), 유학생(6천948명)을 합쳐 재외국민은 1만6천770명이다. 외국 국적자 가운데는 피입양인 1만1천207명도 포함된다.

1일 프랑스 쉬프에서 열린 프랑스 한인 이주 100주년 기념식에서 참석자들이 조형물을 제막하고 있다. 재불 조각가 백승수는 조국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한인들의 안타까움을 한쪽 날개로 형상화했다. [프랑스한인회 제공]

1일 쉬프에서는 최종문 주프랑스 한국대사, 한우성 재외동포재단 이사장, 나상원 프랑스한인회장, 장 레이몽 쉬프시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프랑스 한인 이주 10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이곳에는 한인 도착 100주년을 상징하는 조형물과 기념비도 세워졌다. 4일 파리에서는 유럽한인총연합회 주최로 유럽 한인 이주 100주년 경축 행사가 마련됐다. 이에 앞서 프랑스한인회와 재외동포재단은 올해 2월 '프랑스 한인 100년사-꼬레앙 100년의 항해'를 펴내고 서울과 파리에서 출판기념회를 개최했다.

프랑스는 천주교 선교사들의 순교와 군대의 침입(병인양요)이라는 아픈 역사로 우리와 인연을 맺기 시작했지만 여러 분야에서 도움을 준 우방이다. 6·25 전쟁 때 지상군을 파견하는가 하면 1964년 팔당수력발전소 건설 자금 1천만 달러를 원조하고 1968년부터 한국 유학생들에게 정부 장학금을 지급했다. 문화 예술의 나라답게 미술·음악·영화·패션 등의 분야에서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프랑스 젊은이들이 K-팝과 한식 등 한류에 열광하고 있다. 한국에 체류하는 프랑스인도 9월 현재 유학생 1천993명을 포함해 7천930명에 이른다. 서울에는 KTX 건설 때 파견된 기술자를 중심으로 형성된 프랑스인촌 서래마을도 있다. 프랑스 한인 이민사는 새로운 100년을 향해 막 첫걸음을 뗐다. 한국과 프랑스가 진정한 동반자 관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재불 한인과 재한 프랑스인의 역할을 기대한다. (한민족센터 고문)

이희용 연합뉴스 한민족센터 고문

hee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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