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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던 한국
icon 지나
icon 2019-05-02 10:59:02  |  icon 조회: 3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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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면.
디자인 문구점에서 쓸데없이 갖고싶은 물건들을
잔뜩 주워담았더니 8만원이 넘게 나와버렸다.

부산은 여전하다.
시끄럽고, 요란하고, 편리하고, 볼 거 많고, 무례하다.

물론 이 무례함은 특정인에 의한 개인적인 경험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이제는 백화점도, 할인매장도 아닌 어정쩡한 모습의 쥬디스 태화의 한 매장 쇼윈도에서 
마음에 드는 붉은 스커트를 발견했다. 한눈에 비싸보였지만 가격이 궁금했다.
매장으로 들어가 가격을 물었더니 점원은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삼십이만칠천원이요'라고 숨도 쉬지 않고 답했다.

'비싼 명품을 두르지 않은 너 따위는 상대도 하지 않겠어'라는 마음 속 생각을
그 단 한 마디에 모두 실어 사람을 불쾌하게 할 수 있는 그녀의 능력이 놀라웠다.
난 일부러 "허" 소리를 내곤 스커트에 달린 브랜드명을 확인했다.
잘 모르는 한국인 디자이너의 이름이 찍혀있었다. 
예쁜 물건이었지만 필요한 물건도 아니었고,
오기를 부려 과한 금액을 지불할 정도로 마음에 들지도 않았다. 
물론 스커트를 추하게 보이게 한 건 그녀의 태도였다.
주저없이 매장을 나왔다.
   

3년...
있던 가게들은 많이 사라졌고 새로운 간판들이 붙어있다.
미국 패스트푸드 가게는 한국의 것으로, 그가 다니던 단골 술집은 일식 주점으로 바뀌어 있었고, 
심지어 그가 살던 신축 오피스텔은 건물 전체가 사라져버렸다. 마치 팀 버튼 영화의 한 장면처럼. 
엄마 아빠는 동네에 그런 건물이 존재했다는 사실도 기억하지 못하는 듯 했다. 

음식점에 테이블마다 붙은 벨도 여전했지만 이젠 진동벨을 나눠주는 곳도 많아졌다.  
"패스트" 푸드점에서 고객을 8분 기다리는 게 커다란 죄인냥 말하던 점원.
 다른 제품을 주문하지 않고 "기다릴게요" 하는 내 모습에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내 앞에 서 있던 커플은 메뉴 중 3가지를 가리키며 "이 중 제일 빨리 되는 걸로 주세요"
하더니 30초만에 원하는 음식을 가져갔다.

시내 중심가를 느릿느릿 걷는 사람은 한 명도 없는 것 같았다.
나도 이들처럼, 아니 이들보다 빠른 걸음으로 걸었었지... 를 떠올린다.

한국 미용실에서 적당한 웨이브 펌을 하고 그곳에서 서비스로 제공한 네일 컬러
- 토프(두더지색)를 찾았더니 그런 거 없다 하여 그레이를 선택했다 - 를 바르고,
엄마가 나 주려고 이곳에서 샀다는 짙푸른색 리넨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는데
귀걸이 가게 아가씨는 날 빤히 쳐다보더니 "언니... 어쩐지 영어 잘 하게 생기셨어요"라고 했다. 
순간 너무 놀란 웃음이 터져나왔다. 20대 초반의 그녀는 내게서 '외국에 사는 사람'
같은 분위기가 난다고 했다. 난 그저 "이거 얼마에요" 단 한 마디를 했을 뿐인데...

그새 내 한국어가 어눌해진 걸까, 내 행동이 이상했을까,
한국에도 이젠 흔한 H&M 알반지와 두바이 면세점에서 산 팔찌
- 사고 보니 참 두바이 물건 같지 않은 한국의 거리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디자인 -
가 조금 다르게 보였을까? 화장도 늘 하던 스타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이었다.
다크브라운 섀도우로 눈썹을 메우고, 렌즈를 끼고, 눈화장은 생략했으며,
입술엔 붉은 립스틱을 발랐다. 대체 내 모습 어디에서 그런 분위기가 나는 것인지 신기했다.


인천 공항에서 3개국어로 나오는 안내 방송을 들으며 '아 참... 그랬었지...' 하며
한국에 대한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급하게 개찰구로 들어서는 아주머니와 몸을 부딪혔는데
입에서 순간 Sorry가 튀어나와 얼굴이 붉어졌다.
미국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몇 년을 살다오셨을 뿐인데 한국어 발음을
잘 못/안 하셔서 비웃음을 사던 어떤 교수님 생각이 났다.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했었는데...


그때부터 뇌를 한국식으로 전환시키기 시작했다.
버스에서 점프해서 뛰어내렸고, 노약자석에는 자리가 나도 절대 앉지 않았고,
모르는 아주머니와 할머니가 말을 시키거나 별 거 아닌 일에 화를 내도 놀라지 않았고,
지하철에서 코팅한 종이를 건네는 아저씨에게 잔돈이 없어 천 원을 드리지 못하는 걸
미안하게 생각했다.


8분이 걸린다던 새우 버거는 3분만에 나왔고,
3분 후에 온다고 정류장에 표시된 버스는 고개를 드니 이미 도착해 있었다.
10만원까지도 생각한 카메라 수리비는 보증서 없이도 8천원만 지불하면 되었고, 
2, 3일이 걸릴 거라며 미안해 하더니 하루 반 만에 전화가 걸려왔다. 
병원 검진 결과는 물론 미처 받지 못한 전화에는 문자 안내가 왔다.

스마트폰이나 갤럭시 노트가 아닌 휴대용 장치는 지하철에서 꺼내기 어려운 듯 했고, 
사람들은 멍한 표정 또는 웃음을 참는 표정으로 빠르게 각자의 단말기를 터치했다. 
어린 아이들 손에도 형형색색의 폰케이스(미키마우스, 리본 등)에 감싸인
예전보다 크고, 둥글고, 납작한 비슷비슷한 모양의 폰들이 들려 있었다. 
세로가 아닌 가로로 들고 있는 걸 보니 그 나이대 아이들은 카톡이나 인터넷 서핑보다는
게임에 푹 빠져있는 듯 했다.

덕분에 책이나 신문을 읽는 젊은이의 수는 더욱 줄어든 것 같았다. 
덕분에 난 그들의 모습을 마음껏 구경할 수 있었다. 

적당히 염색한 긴 웨이브 헤어가 아니면 찰랑이는 새까만 스트레이트 헤어를 고수하는 
여성들이 많이 보였다. 일명 똑단발에 발롱펌을 하거나 머리끝을 완벽하게 뒤집은
스타일도 자주 보였다. 완벽한 머리를 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 무서울 지경이었다. 

10대 아이들 사이엔 여전히 두꺼운 일자 앞머리가 인기인 듯 했고, 
꺼벙해 보이는 바가지 머리나 커다란 공갈 안경을 쓴 아이들도 보였다. 
요즘 껌 좀 씹어주시는 아이들은 커다란 등산 가방을 많이 매고 다닌다 했다. 
가방 속에 책은 별로 없고 치장하기 위한 도구가 가득하다 했다.
교복을 입고 화장을 하는 아이들이야 예전부터 존재했지만 이젠 화장법이 바뀐 모습이었다. 
컬러 렌즈를 끼고, 위아래 아이라인을 연결한 인형눈에 틴트를 바른 아이들이
문장마다 걸쭉한 욕설을 섞어 말했다. 한 교복 차림의 예쁘장한 여자 아이는 
가방을 부시럭거리더니 제 얼굴보다 커다란 거울을 불쑥 꺼내들어 깜짝 놀랐다.
책 한 권 무게는 될 것 같은 대단한 크기였다.
 
패션에 둔감한 아일랜드(라고 하면 화낼 사람들이 있겠지만) 학생 교복은
길고 촌스러운 편에 속한다. 들은 바로는 일부러 최대한 섹시하지 않게 만든다 했다.
특히 여학생들이 성숙해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 디자인의 목적이라 했다.
그 중 가슴을 풍덩하게 가리는 두툼한 스웨터는 압권이다.

그런데 한국 여학생 교복은 점점 섹시해지고 있다.
다리가 길어보이는 교복, 학생들의 스타일과 개성을 존중하는 스타일이겠지만 
언뜻 보기에도 탑은 불편하리만큼 짧고, 몸에 딱 달라붙으며,
일본 만화에 나오는 캐릭터처럼 짧은 길이의 치마(물론 수선했겠지만)도 보였다.
 
예쁘다고는 생각하지만 이상적인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역시 이곳은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일정한 패턴을 유지하며... 

예전보다 개성은 강해졌지만 여전히 일정한 패턴이 존재한다.
유럽, 미국 패션 런웨이에 등장한 스타일이 어느새 한국인 체형에 맞게 편집되어 
더욱 꼼꼼하고 저렴한 모습으로 팔리고 있다. 

한국은 변했지만 예상했던만큼의 변화인지라 그리 놀랍지는 않다.
정형성이라는 틀이 잘 깨어지지 않는 나라니까.



나는 줄곧 멍한 기분으로 거리를 걸어다녔다.
그게 바뀐 환경 탓인지, 시차 피로 탓인지, 유난히 더 시끄럽게 들리는
주변 소음 때문이었는지, 그 모든 것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분명 이곳에서 나고 자란 이 공간에 어울리는 얼굴을 한 사람인데
어쩐지 공기 중에서 부유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엄마는 늦지 않게 들어와 집에서 밥을 먹으라 했다.
아빠에게서 지금 어디냐, 언제 들어오냐는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 한 통으로 직접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정겨운 사람들이 있었다.

낯설고도 익숙한 기분이었다. 

2019-05-02 10:5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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