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110년 전 안중근을 도운 애국지사들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110년 전 안중근을 도운 애국지사들
  • 이희용
  • 승인 2019.10.18 08: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110년 전 안중근을 도운 애국지사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뒤 러시아 관헌에게 체포되는 장면을 묘사한 기록화. [독립기념관 제공]

(서울=연합뉴스) 지금으로부터 110년 전인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일본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특별열차가 중국 창춘(長春)을 출발해 하얼빈(哈爾賓)역에 도착했다. 하얼빈은 중국 영토였으나 러시아가 만주 동청철도(東淸鐵道)를 건설하며 사실상 조차지처럼 영유하고 있었다. 플랫폼에 대기하고 있던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체프가 열차에 올라 20여 분간 이토와 환담한 뒤 함께 내렸다.

이토 일행이 러시아 군악대의 연주 속에 열병식을 마치고 사절단과 이동하는 도중 환영 인파 가운데 한 청년이 튀어나와 브라우닝 7연발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3발은 이토의 가슴, 옆구리, 배에 명중했고 나머지는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다이지로, 만주철도주식회사 이사 다나카 세이타로를 맞혔다. 청년은 표적인 이토가 쓰러지는 것을 확인한 뒤 러시아어로 "코레아 우라(한국 만세)"라고 힘차게 외쳤다. 그의 이름은 안중근이었다.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哈爾濱)역 1번 플랫폼. 안중근 의사의 거사 지점을 알리는 표시와 현판이 설치돼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안중근은 현장에서 순순히 러시아군에 체포됐다. 이토는 30분 만에 숨졌고 나머지는 중경상에 그쳤다. 일본이 을사조약에 따른 한국인 관할권을 내세워 신병 인도를 요구하자 러시아군은 1차 조사만 한 뒤 하얼빈 일본총영사관으로 넘겼다. 중국 뤼순(旅順)감옥으로 옮겨져 재판을 받은 안중근은 이듬해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고 3월 26일 순국했다.

하얼빈역에 울려 퍼진 7발의 총성은 좌절감과 무력감에 빠져 있던 한국인들의 독립 의지를 일깨웠고 열강들이 식민지로 전락하기 직전의 한국을 다시 보게 했다. 그가 옥중에서 저술한 '동양평화론'은 일제 침탈의 부당성을 성토한 격문이자 국권 회복 운동의 방향을 제시한 이정표였다.

안중근 의거를 도운 인물들을 소개한 초등학교 6학년 1학기 사회 교과서 표지와 본문. [재외동포재단 제공]

그러나 이 거사를 안중근 혼자서 이뤄낸 것은 아니다. 올해 초 개정 배포된 초등학교 6학년 1학기 사회 교과서는 '나라를 지키기 위한 안중근의 노력을 알아봅시다'란 단원에서 그의 발자취를 설명한 뒤 '안중근의 의거를 도운 사람들은 누구일까'란 부제 아래 재외동포 최재형을 비롯해 우덕순·유동하·조도선의 역할을 소개했다.

최재형은 1869년 러시아로 이주해 1884년 귀화한 고려인 1세대다. 러시아군에 부식을 공급하고 정부 발주 도로 공사에 참여해 큰돈을 벌었다. 고려인 계몽운동과 가난 퇴치에 힘써 '고려인의 페치카(난로)'라는 별명을 얻었고, 동의회와 권업회를 결성하며 독립투쟁에 앞장서 '연해주 항일운동의 대부'로 꼽혔다.

최재형은 안중근이 1908년 이범윤·이위종·엄인섭 등과 함께 동의회 의병부대를 조직해 국내 진공 작전을 펼칠 때 자금 지원을 도맡았다. 안중근은 거사를 앞두고 최재형의 집에서 지내며 그가 구해준 권총으로 사격 훈련을 했다. 최재형은 안중근과 그의 동료들이 붙잡혀 재판을 받을 때도 물심양면으로 뒷바라지했다.

8월 12일 러시아 우수리스크의 최재형기념관 앞에서 최재형 기념비 제막식이 열리고 있다. 왼쪽부터 김재윤 전 국회의원, 정병천 국가보훈처 과장, 오성환 블라디보스토크 한국총영사, 안민석 국회의원, 소강석 한민족평화나눔재단 이사장, 최재형 손자인 최발렌틴 러시아독립유공자협회장, 문영숙 최재형기념사업회 이사장, 이블라디미르 우수리스크시의원. [연합뉴스 자료사진]

안중근은 초대 조선 통감을 지낸 일제 침략의 원흉 이토가 하얼빈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우덕순에게 그를 처단하자고 제의했다. 안중근보다 한 살 아래인 우덕순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연초 행상을 하다가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동의회 의병부대 일원으로 안중근과 함께 국내 진공 작전에도 참여했다.

유동하는 러시아어에 능해 통역 요원으로 합류했는데, 거사 당시의 나이가 만 17세에 불과했다. 한의사인 부친 유경집(유승렬)은 안중근과 친분이 두터웠다. 안중근과 동갑인 조도선은 세탁업과 러시아어 통역을 하며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대동공보 하얼빈지국 김형재의 소개로 맨 나중에 가세했다.

중국 랴오닝(遼寧)성 뤼순(旅順)고등법원에서 이토 히로부미 피살사건의 공개재판이 열리고 있다. 왼쪽부터 유동하, 조도선, 우덕순, 안중근. [독립기념관 제공]

이들은 이토가 탄 열차가 하얼빈에 도착하기 3시간 전에 차이자거우(蔡家溝)역에서 정차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우덕순과 조도선은 그곳에서 기회를 엿보다가 이토가 내리면 우덕순이 저격하기로 계획을 짰다.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기다렸고, 유동하는 하얼빈에서 남아 연락 업무를 맡았다.

우덕순과 조도선은 차이자거우역의 감시가 워낙 심해 특별열차가 2분간 정차했는데도 머물던 방에서 나오지 못했다. 안중근의 거사가 성공한 뒤 러시아 헌병에게 몸수색을 당해 권총과 탄환이 나오자 체포됐다. 유동하도 러시아 관헌이 하얼빈 일대를 검문검색하는 과정에서 안중근과 함께한 행적이 드러나 연행됐다. 우덕순은 징역 3년 형, 조도선과 유동하는 각각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이들 3명에게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이들 외에도 안중근의 거사를 도운 인물은 많다. 그의 애국혼과 의협심을 키워낸 부친 안태훈과 모친 조마리아, 신앙의 세계로 이끌고 국제 정세를 전해준 니콜라 빌렘(한국명 홍석구) 신부, 1907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의형제를 맺고 의병을 함께 일으킨 엄인섭과 김기룡, 1909년 3월 러시아 크라스키노에서 손가락을 끊어 혈서로 위국헌신(爲國獻身)을 맹세한 11명의 '단지동맹' 회원, 사건 연루자로 지목돼 고초를 겪은 김성옥·김태식·장수명·탁공규·김성화·홍청담·김형재 등 한인 지도자 모두 함께 거사에 함께한 동지였다.

지난 8월 16일 서울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안중근 하얼빈 의거 110주년 기념 메달'이 공개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충남 천안의 독립기념관은 안중근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해 한 달 간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에서 안중근 사진 등 9점을 전시하고 있다. 18일 오후 대구 국채보상운동기념관 2층 기획전시실에서는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대구가톨릭대 안중근연구소, 가톨릭신문사 공동 주최로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110주년 기념 학술회의'가 열린다. 하얼빈과 뤼순 역사 탐방 행사가 이어지는가 하면 기념 메달이 제작되고, 하얼빈에서도 기념행사가 마련된다.

안중근의 업적과 유훈을 기리면서 그를 도운 인물들의 헌신도 잊지 말아야 한다. 또 이들의 후손이 러시아를 비롯한 CIS 동포(고려인)이고 중국 동포(조선족)라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heeyong@yna.co.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