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순국 100년 맞은 유관순 스승 김란사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순국 100년 맞은 유관순 스승 김란사
  • 이희용
  • 승인 2019.10.14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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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순국 100년 맞은 유관순 스승 김란사

여성 독립운동가 김란사. 서양식 머리 모양과 옷차림이 인상적이다. [김란사애국지사기념사업회 제공]

(서울=연합뉴스) 1894년 어느 늦은 밤 쪽머리를 한 20대 여성이 하인을 앞세우고 당시 유일한 여성 근대 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의 문을 두드렸다. 이름은 김란사(金蘭史). 남편도 있고 아이까지 딸린 몸이었지만 학교에 다니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미국 출신의 선교사 룰루 프라이 학당장(교장)은 금혼 학칙을 들어 거절한 뒤 "가정을 이뤄 풍족하게 사는 당신이 왜 소녀들과 똑같이 순종하며 여기에 다니기를 원하는지 알 수 없다"고 덧붙였다.

그러자 그는 하인이 들고 있던 등불을 입으로 불어 끈 뒤 "우리가 캄캄하기를 이 등불 꺼진 것 같다. 어머니들이 무엇인가 배우고 알아서 자식을 가르칠 수 있게 될 때까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겠나. 우리에게 밝은 빛을 줄 수 없겠는가"라고 부탁했다. 간곡한 호소에 감명받은 학당장은 입학을 허가했다.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김란사 순국 100주년 특별전 '꺼진 등에 불을 켜라'가 열리고 있는 이화박물관 전경.

그로부터 21년 뒤 유관순이 이화학당 보통과 2학년으로 편입했다. 그때도 학당장은 프라이였고, 김란사는 총교사(교감)를 맡고 있었다. 유관순은 1918년 고등과로 진학해 학생자치단체 이문회(以文會)에서 활동하며 민족의식을 길렀다. 이문회를 이끌던 김란사는 유관순에게 "조선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다오"라고 부탁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순국 항일 여성의 아이콘 유관순 열사의 삶을 재조명하는 작업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정부는 1962년 추서된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의 훈격이 낮다는 여론을 받아들여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가로 수여했고, 영화 '항거:유관순 이야기'와 '1919 유관순'이 잇따라 개봉됐다. 그러나 유관순의 스승 김란사의 발자취는 물론 존재 자체를 기억하는 사람이 드물다. 그는 선각자이자 글로벌 리더였고, 교육자·여성운동가·신앙인이면서 독립운동가였다.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김란사 특별전 전시장 입구. 어두운 길에 등불을 밝히는 콘셉트로 꾸몄다.

김란사는 1872년 9월 1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국가보훈처 공훈록에는 평안남도 안주로 기록돼 있으나 김란사 후손은 집안 어른에게서 고향이 평양이라고 들었다고 증언한다. 두 살 때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사해 자라다가 1893년 17살 위의 하상기와 결혼했다. 인천시 행정책임자인 남편은 전 부인과 사별하고 재혼했다.

당시로는 만학도이자 유일한 기혼 학생인 김란사는 어린 학생들과 함께 이화학당에서 영어와 신학문을 배우고 개신교도 접했다. 세례명 낸시(Nancy)는 영어 이름이기도 했다. 1895년 관비 유학생으로 뽑혀 남편과 함께 일본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에서 1년간 수학했다. 여성 최초이자 유일한 일본 유학생이었다.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정부가 1995년 김란사에게 추서한 건국훈장 애족장과 훈장증. '하란사'라고 적힌 이름은 2018년 '김란사'로 정정됐다.

일본에서 공부하며 신문명과 서세동점을 실감하고 돌아온 김란사는 서재필 박사의 강연을 듣고 남녀가 동등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남편과 태평양을 건너 1897년 11월 30일 샌프란시스코항에 도착했다. 입국신고서에 기재된 이름은 난사 하(Nansa Ha). 결혼하면 남편 성을 따르는 미국식 관습 때문에 한동안 하란사로 잘못 알려졌다. 훈장증과 공훈록에도 하란사로 기재돼 있었으나 유족의 요청에 따라 2018년 바로잡았다.

김란사는 워싱턴DC 전도부인양성소를 거쳐 1900년 오하이오주 웨슬리안대 문과에 입학해 1906년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 여성으로서는 처음이었다. 웨슬리안대에는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도 수학 중이었다. 이때 맺은 인연을 발판으로 고종을 비롯한 황실의 신임을 얻었다.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김란사 특별전에 전시된 김란사의 유품. 왼쪽부터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 위탁유학생 학적부, 친필 서명이 담긴 한영사전, 김란사를 소개한 글이 실린 미국 북감리교 선교지 'The Lure of Korea'.

뭇사람의 기대와 환영 속에 귀국한 김란사는 모교 이화학당에 부임해 영어와 성경을 가르치는 동시에 상동교회 영어학교에서 기혼 여성들을 가르쳤다. 고종의 계비(엄비)가 진명·숙명학교를 설립할 때 자문에 응하는가 하면 부인성서학원을 창설하고 이화학당 육아교실을 운영하기도 했다.

1911년 영문 선교지 'The Korea Mission Field'에서 개화파 거두 윤치호와 벌인 지상 논쟁을 보면 여성운동가이자 교육자로서의 면모가 잘 드러난다. 윤치호가 7월호에 "신(新)학교 학생들은 요리하는 법을 모른다. 바느질하는 법, 빨래하고 다림질하는 법도 모른다. 어떤 때엔 시어머니에게도 순종하지 않는다"란 내용의 글을 기고하자 김란사는 12월호에 "학교의 목적과 방향은 슬기로운 어머니, 충실한 아내, 깨우친 가정주부가 될 수 있는 신여성을 배출하는 것이다. 요리사나 간호원, 침모를 배출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김란사 남동생의 손자인 김용택 김란사애국지사기념사업회장이 대고모의 발자취를 설명하고 있다.

1916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세계감리회총회에 한국 평신도 대표로 참석한 김란사는 2년간 미국에 머물며 신학을 공부하는 한편 미국 전역을 돌며 동포들의 단결심과 애국심을 고취하고 독립자금 모금을 호소했다. 김란사는 성금을 모아 1918년 한국 최초로 정동교회에 파이프오르간을 설치했다. 이 파이프오르간의 지하 송풍실은 이듬해 기미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을 찍어내는 아지트가 됐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강화회의가 열리자 고종은 의친왕을 파견해 일제 침략의 부당함을 알리려고 했으나 1919년 1월 22일 갑작스럽게 승하해 계획이 중단됐다. 신한청년단은 1919년 2월 김규식을 파리에 파견했고, 의친왕의 밀지를 받은 김란사도 파리로 떠나려고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1919년 3월 10일 베이징의 부영병원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2018년 4월 4일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김란사를 비롯한 호국 영령들의 합동 위패 봉안식이 열리고 있다. [김란사애국지사기념사업회 제공]

김란사의 불꽃 같은 삶은 한동안 잊혔다. 유해도 찾지 못했고 시댁의 후손은 대가 끊겼다. 친정 종손자 김용택 씨가 김란사애국지사기념사업회를 결성해 이끌고 있다.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2018년 4월 4일 국립서울현충원에 위패를 봉안했다.

올해는 김란사 순국 100주년을 맞는 해다. 연극 '그 스승에 그 제자-김란사와 유관순'과 음악극 '100년 후 꿈꾸었던 세상'이 상연되고 아동용 전기 '김란사, 왕의 비밀문서를 전하라'가 출간되는 등 다양한 추모 사업이 펼쳐지고 있다. 서울 중구 정동 이화여고 구내의 이화박물관에서는 특별전 '꺼진 등에 불을 켜라'가 열리고 있다. 12월 31일까지 그의 유품과 사진, 신문, 도서 등이 선보이고 있다.

김란사 순국 100주년 기념 특별전 '꺼진 등에 불을 켜라' 포스터.

암울한 시절 김란사는 자신과 조국의 앞날에 불을 밝히고자 신학문을 배웠다. 그는 스스로 조선 여성의 등불이 되고 제자 유관순을 민족의 등불로 만들었다. 2020년은 유관순 열사의 순국 100년을 맞는 해다. 유관순의 업적을 기리며 그의 애국혼을 키워준 스승 김란사의 업적도 떠올려 보면 어떨까. (한민족센터 고문)

hee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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