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조훈현 세계 바둑 제패 30주년과 AI 각축전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조훈현 세계 바둑 제패 30주년과 AI 각축전
  • 이희용
  • 승인 2019.09.0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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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조훈현 세계 바둑 제패 30주년과 AI 각축전

제1회 잉창치배에서 우승한 조훈현 9단이 1989년 9월 6일 서울 김포공항에 도착해 환영객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1988년 8월 21일 중국 베이징에서 제1회 잉창치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의 막이 올랐다. 대만의 거상이자 바둑 애호가 잉창치가 100만달러의 상금을 걸고 창설한 이 대회는 4년마다 열려 바둑 올림픽으로 불렸다. 우승 상금 40만달러는 그해 US오픈 골프대회 우승 상금(16만달러)의 갑절이 넘어 각국의 프로기사들을 설레게 했다.

잉창치배 대회를 준비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현대바둑의 종주국을 자처하는 일본의 요미우리신문이 한발 앞서 1988년 4월 도쿄에서 제1회 후지쓰배 대회를 개최했다. 최초의 세계바둑선수권대회라는 영예는 후지쓰배에 빼앗겼어도 전 세계 바둑인들의 눈은 잉창치배에 쏠렸다. 상금도 거액이지만 일본의 바둑 2천여 국을 분석해 흑백의 승률을 비슷하게 만들었다는 덤 8점(7집 반)의 룰도 관심거리였다.

1989년 4월 25일 중국 항저우에서 열린 제1회 잉창치배 결승 제1국에서 조훈현 9단(오른쪽)이 중국의 녜웨이핑과 대결하고 있다. [한국기원 제공]

참가 기사는 모두 16명. 일본 5명, 중국 4명, 대만 3명이었는데 한국인은 조훈현과 조치훈 2명뿐이었다. 조치훈도 일본기원 소속이어서 한국은 프로바둑 리그가 없는 미국·호주와 똑같이 한 명만 초대받은 것이다. 4개월 전 후지쓰배에 조훈현·서봉수·장두진 3명이 출전했다가 16강 1회전에서 모조리 탈락해 주최 측은 한국 기사들의 실력을 일본·중국·대만의 한 수 아래로 여겼다.

그러나 조훈현은 이런 평가를 비웃듯 대만의 왕밍완과 일본의 고바야시 고이치를 16강전과 8강전에서 각각 물리친 데 이어 준결승에서 대만의 강호 린하이펑을 눌렀다. 결승 상대는 중·일 슈퍼대항전에서 일본 기사들을 연파하고 3년 연속 중국의 승리를 지켜낸 '철(鐵)의 수문장' 녜웨이핑이었다. 그는 마이클 레드먼드, 조치훈, 후지사와 슈코를 차례로 꺾었다.

결승전 제1국은 1989년 4월 25일 중국 항저우에서 치러졌다. 2대2로 팽팽히 맞선 가운데 1989년 9월 5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마지막 제5국에서 녜웨이핑은 145수 만에 돌을 던졌다. 조훈현이 마침내 세계 바둑의 황제로 등극한 것이다. 5일은 조훈현의 바둑 세계 제패 30주년 기념일이다.

제1회 잉창치배에서 우승한 조훈현 9단이 1989년 9월 6일 서울 김포공항에서부터 카퍼레이드를 펼치고 있다. [한국기원 제공]

1953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난 조훈현은 어릴 때부터 천재성을 드러냈다. 바둑을 따로 배우지 않고도 어깨 너머로 구경만 하다가 4살 때 첫 대국에서 기력 8급의 아버지를 이긴 것이다. 이듬해 아버지는 서울로 이사해 아들을 김인 초단에게 맡겼다. 일취월장으로 급성장한 조훈현은 초등학교 3학년 때인 1962년 10월 14일 프로에 입단했다. 9년 7개월의 세계 최연소 입단 기록은 지금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그는 1963년 10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세고에 겐사쿠 9단의 문하생이 됐다. 일본기원은 한국기원에서 받은 2단을 4급밖에 쳐주지 않아 1966년 다시 입단했다. 1971년 5단으로 승단하며 착실히 기력을 쌓다가 1972년 3월 병역을 마치기 위해 귀국했다. 세고에는 애제자를 잃은 안타까움을 이기지 못하고 4개월 뒤 자살했다.

1989년 10월 27일 최병렬 문화공보부 장관이 제1회 잉창치배에서 우승해 국위를 선양한 조훈현 9단에게 은관문화훈장을 걸어주고 있다. 한국 현대바둑의 개척자인 조남철 9단(맨 왼쪽)도 함께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한국기원 제공]

조훈현은 공군 복무 시절인 1974년 1월 스승 김인 8단으로부터 최고위전 타이틀을 빼앗은 것을 시작으로 국내 기전을 석권했다. 1980년 첫 전관왕(9개)에 올랐고 국내 최초로 9단으로 승단했다. 2인자 서봉수가 끈질기게 조훈현의 아성을 위협했으나 난공불락이었다. 조훈현은 1982년(10개)과 1986년(11개)에도 전관왕을 달성했다.

잉창치배 우승 이후로도 진로배(1993년), 동양증권배(1994년), 후지쓰배(1994년)에서 우승해 국제기전 그랜드슬램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세계 최다승(1천949회), 세계 최다 우승(160회), 단일 기전 세계 최다 연속우승(패왕전 16연패)도 좀처럼 깨지기 힘든 전설적인 기록들이다.

2005년 11월 4일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한국 현대바둑 60주년 기념식에서 사제 간인 조훈현(오른쪽)·이창호 9단이 핸드프린팅을 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조훈현이 한국 바둑에 남긴 또 다른 불멸의 업적은 제자 이창호를 키워낸 것이다. 잉창치배는 조훈현에 이어 서봉수·유창혁·이창호가 잇따라 차지했는데, 특히 이창호는 국내외 기전을 휩쓸며 1990년부터 2006년까지 세계 랭킹 1위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전보다 훨씬 치열해진 국제 경쟁 속에서 16년간이나 부동의 1인자로 군림하며 평소 입버릇처럼 말하던 "스승을 이겨 스승의 은혜를 갚겠다"는 다짐을 실천했다.

2016년 3월 한국 바둑은 세계를 또 한 번 주목하게 했다. 바둑의 인기가 식었어도 바둑을 전혀 모르는 사람의 눈과 귀까지 집중시킨 일대 사건이었다. 이세돌 9단은 구글 딥마인드가 개발한 인공지능(AI)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와 대결해 4대1로 쓴잔을 마셨다. 세계 최정상급 기사가 컴퓨터에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이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이후 알파고는 랭킹 1위 커제 등에게 완승을 해 이세돌의 1승은 인간이 알파고에 따낸 유일한 승리로 남았다.

2016년 3월 13일 서울 광화문 포시즌스호텔에서 이세돌 9단(오른쪽)이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 5번기에서 알파고와 제4국을 벌이고 있다. 이 대국은 이세돌의 불계승으로 끝났다. [구글 제공]

동아시아 여러 문화가 그렇듯이 바둑도 중국에서 시작돼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근대화에 앞선 일본이 이를 서양에 퍼뜨렸기 때문에 구미에서는 중국식 명칭인 '웨이치'(圍棋)나 한국의 바둑 대신 일본식 발음인 '고'(碁)라고 부른다. 만일 한국을 통해 알려졌다면 구글은 '알파고'가 아니라 '알파바둑'이라고 명명했을 것이다. 2010년대 들어 한국기원이 바둑 한류를 전파하며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고'를 바둑으로 바꾸고자 애쓰고 있지만 아직은 성과가 두드러지지 않아 보인다.

현대바둑은 거꾸로 일본에서 꽃을 피웠다가 한국에 주도권을 넘겨준 뒤 이제 중국이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현재 대전에서 열리고 있는 삼성화재배 대회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한국 기사들이 8강전에서 전패해 중국 기사들끼리 4강전을 치렀다. 중국이 5년 연속 우승컵을 차지하게 된 가운데 4일부터 사흘간 결승전 3번기가 열린다.

알파고 개발사인 구글 딥마인드의 CEO 데미스 허사비스가 2017년 5월 24일 중국 저장성 우전 인터넷 국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인공지능의 미래 포럼'에 참석해 알파고의 학습 훈련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알파고는 전날 세계 랭킹 1위의 커제에게 완승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바둑을 둘러싼 한·중·일의 각축전 양상이 앞으로 또 어떻게 변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승부가 이미 펼쳐지고 있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이 상징하듯 AI는 금융·의료 등 여러 분야의 달인을 차례차례 뛰어넘고 있으며 산업 전반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30년 전 조훈현이 세계 바둑 왕좌에 오르며 한국 바둑의 전성기를 이끈 것처럼 AI가 주도하는 제4차 산업혁명 경쟁에서 한국이 중심국가로 도약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기초와 정석을 소홀히 하며 승리를 바랄 수는 없다. '묘수 세 번이면 바둑 진다'는 격언을 명심해야 한다. (한민족센터 고문)

hee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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