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우장춘 60주기에 생각해보는 '기술 독립'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우장춘 60주기에 생각해보는 '기술 독립'
  • 이희용
  • 승인 2019.08.07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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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우장춘 60주기에 생각해보는 '기술 독립'

 

 

'한국 육종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우장춘 박사. [농촌진흥청 제공]

 

(서울=연합뉴스) 지금으로부터 꼭 60년 전인 1959년 8월 7일, 서울 중구 을지로6가 국립중앙의료원에 입원해 있던 우장춘은 이근식 농림부 장관에게서 문화포장을 받았다. 애국가 작곡자 안익태(1955년)에 이어 두 번째 영예였다. 기념 메달을 목에 건 그는 "마침내 조국이 나를 인정했다"며 눈물을 흘렸다. 그로부터 사흘 뒤 눈을 감았다. 오는 10일은 우장춘 60주년 기일이다.

 

 

우장춘 박사가 국립중앙의료원에서 투병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자료 사진]

 

우장춘은 다문화가정 자녀였다. 아버지는 1895년 을미사변 때 일본군의 길잡이 역할을 한 조선군 훈련대 제2대대장 우범선이고, 어머니는 일본인이다. 1898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는데, 5년 뒤 아버지는 대한제국 관료를 지낸 고영근에게 피살됐다. 일본인 어머니 손에 자랐고 아내도 일본인이었다. 귀국 후 우리말이 서툴러 '사이비 애국자'란 소리도 숱하게 들었다.

 

그런데도 대한민국 정부는 임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국무회의를 열어 문화포장 수여를 결정했다. 8월 14일 사회장을 거행해 경기도 수원시 농촌진흥청 구내의 여기산 기슭에 안장했다. 그가 어떤 인물이기에 반일 감정이 심하던 그 시절에 국민의 존경과 추모를 받을 수 있었을까. 시인 이은상이 지은 묘비명을 보면 발자취와 업적을 짐작할 수 있다.

 

 

우장춘 박사의 아내 쓰노다 후사코 씨가 쓴 남편 일대기 '나의 조국'의 표지.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란 부제가 달려 있다.

 

'불우와 고난 속에 진리를 토파내어/ 종자합성 새 학설을 세계에 외칠 적에/ 잠잠턴 학문의 바다 물결 한 번 치니라/ 온갖 채소 종자 우리 힘으로 길러내어/ 겨레를 위하시니 그 공로 얼마던고/ 빛나는 문화포장을 웃고 받고 가니라/ 흙에서 살던 인생 흙으로 돌아가매/ 그 정신 뿌리되어 싹트고 가지 뻗어/ 이 나라 과학의 동산에 백화만발하리라'

 

묘비에 새겨진 대로 그가 실험으로 입증한 '종의 합성' 이론은 다윈의 진화론을 수정하도록 만든 획기적인 성과였고, 일본의 수입 종자에 의존하던 채소를 한국의 토양과 기후에 맞도록 개량한 것은 자립 농업을 넘어 종자 수출국으로 도약하게 만든 쾌거였다.

 

 

2016년 8월 23일 전북 전주시 농촌진흥청 농업과학관에서 열린 '우장춘 박사 특별전'에서 어린이들이 '씨 없는 수박'을 관찰하고 있다. [농촌진흥청 제공]

 

부산시는 우장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1999년 동래구 우장춘로의 옛 원예시험장 자리에 우장춘기념관을 건립하며 입구를 '씨 없는 수박'을 연상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묘비명에는 우장춘의 발명품으로 '씨 없는 수박'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일본의 기하라 히토시가 개발한 것인데, 우장춘이 육종학의 원리를 소개하며 대표적 사례로 들고 재배 시연까지 하다 보니 와전된 것이다.

 

그렇다고 '씨 없는 수박'이 우장춘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그는 배추와 양배추 사이의 자연교잡으로 유채가 생겨난 것을 보고 인공 실험으로 재현했다. 이로써 생물이 '자연 선택'만으로 진화해온 것이 아니라 '종간(種間) 결합'도 작용한다는 점이 입증됐다. 이 이론에 따라 기하라는 수박의 염색체 수를 변형한 뒤 정상적인 개체와 교배해 새로운 품종을 만들어낸 것이다.

 

 

우장춘 박사가 개발한 겹꽃 피튜니아. [연합뉴스 자료사진]

 

우장춘은 아버지를 일찍 여읜 탓에 늘 가난과 상실에 시달렸고 조선인의 자식이라는 낙인까지 그를 괴롭혔다. 고등학교를 고학으로 마친 뒤 1919년 도쿄제국대 부설 전문학교 농학실과를 졸업하고 일본 농림성 농업시험장에 취직했다. 1930년 개발한 겹꽃 피튜니아(일명 우장춘 꽃)는 미국 시장에 불티나게 팔려나가 그에게 '피튜니아의 마술사'란 별명을 선사했고 종묘 상인들에게는 떼돈을 안겨주었다.

 

1936년 박사학위를 취득한 우장춘은 면화시험장장으로 승진한 데 이어 이듬해 다키이연구농장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무렵 우장춘은 육종학계의 스타였다. 육종학 서적에 단골로 등장하는 'UN'이란 표기는 '우 나가하루'의 영문 약자다. 우장춘은 호적에 일본식 이름 '스나가 나가하루(須永長春)'를 올렸지만 평소엔 한국식 성을 고집했다.

 

 

우장춘 박사가 1935년 만든 나팔꽃 표본. [농촌진흥청 제공]

 

1945년 광복을 맞자 우장춘은 농장장을 그만두고 귀국을 서둘렀다. 일본 정부가 가로막자 한국인 귀국 예정자들이 대기 중인 오무라수용소에 제 발로 들어갔다. 한국에서도 환국추진위원회를 결성해 귀국을 도왔다. 아내와 2남 4녀를 일본에 남겨둔 채 1950년 3월 8일 단신으로 부산에 도착했다. 환영 인파를 향해 그는 "지금까지 어머니의 나라를 위해 힘썼으나 이제는 아버지의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정부는 1948년 부산시 동래구에 설립한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책임을 맡겼다. 농업과학연구소는 1953년 중앙원예기술원으로 개편됐다가 1957년 농사원 원예시험장으로 바뀌었다. 우장춘은 농림부 장관 제의나 거액의 스카우트 유혹도 마다하고 이곳에 머물며 연구에 몰두했다.

 

우장춘 박사가 1935년 나팔꽃 실험 과정을 적은 기록장과 연구 노트. [농촌진흥청 제공=연합뉴스]

 

당시에는 일본이 종자 반출을 막아 농민들은 농사를 짓기조차 어려웠다. 우장춘은 1954년 전남 진도에서 종자를 채취한 무와 배추의 원종(原種)을 생산하는 데 성공해 농가에 보급했다. 요즘 김치로 담가 먹는 배추와 무는 그가 우리 입맛과 풍토에 맞게 개량한 것이다. 대관령 시험장에서 개발한 무병(無病) 씨감자는 '강원도 감자'의 모태가 됐고, 제주도민을 먹여 살린 밀감과 유채도 우장춘에 의해 본격 재배됐다. 고추, 양파, 오이, 토마토, 참외, 수박 등도 그의 손을 거쳐 우량종으로 거듭났다.

 

이밖에 장미, 카네이션, 국화 등의 품종을 개량하고 코스모스를 전국의 철로변과 길가에 심게 했다. 후진 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그는 평소 제자들에게 관찰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눈빛이 종이 뒤를 뚫는다'는 말을 본떠 "안광(眼光)이 엽배(葉背)를 철(徹)하라"고 가르쳤다.

 

 

우장춘 박사는 모친상 때 들어온 조위금으로 우물을 파고 자유천(慈乳泉)이라고 명명했다. 우장춘기념관에 비석이 세워져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우장춘은 1953년 6월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일본을 방문하려 했으나 정부는 돌아오지 않을 것을 염려해 출국을 불허했다. 결국 임종하지 못한 채 시험장 강당에 분향소를 마련했다. 전국 각지에서 조위금이 답지하자 식수 부족에 시달리는 주민을 위해 우물을 파고 '어머니의 젖줄 같은 샘'이란 뜻으로 '자유천'(慈乳泉)이라고 이름 지었다.

 

우장춘이 필생의 과업으로 삼은 것은 이기작(二期作)이 가능한 벼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십이지장궤양이 악화해 입원한 그는 병상의 링거병 옆에 벼를 비닐봉지에 담아 걸어놓고 관찰할 정도로 열의를 보였으나 결실을 보지 못했다. 그가 조금만 더 오래 살았다면 보릿고개란 말이 일찍 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지난 5월 20일 전북 완주군 국립원예특작과학원에서 열린 우장춘 박사 서거 60주기 추모제에서 추모객들이 우 박사 동상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다. [농촌진흥청 제공]

 

부산시, 동래구, 부산과학기술협의회는 9일 오전 10시 우장춘기념관에서 60주기 추모식을 개최한다. 우장춘기념관은 오는 11일까지 시민 헌화 순서와 비누 만들기, 수경 식물 키우기 등 체험행사를 마련한다. 이에 앞서 농촌진흥청은 5월 20일 전북 완주군 국립원예특작과학원에서 추모제를 열었다.

 

한일 갈등이 경제전쟁으로 번져가자 소재산업 분야의 기술 독립을 이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1950년대 척박한 농업 풍토에서 눈부신 성과를 이뤄낸 '한국 육종학의 아버지' 우장춘의 헌신과 노고가 새삼 고맙게 느껴지고, 후학들의 분발을 기대하는 마음이 더욱 절실해진다. (한민족센터 고문)

 

 

hee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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