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비 와도 꼭 나와주세요"…건설 인력시장 귀한몸 된 이주노동자
[르포] "비 와도 꼭 나와주세요"…건설 인력시장 귀한몸 된 이주노동자
  • 이상서
  • 승인 2021.11.04 07: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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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탓에 이주노동자 급감하며 인력 쟁탈전까지 벌어져
일당 20만원에도 인력 못 구해…"제값 받고 좋은 현장 골라가"

[르포] "비 와도 꼭 나와주세요"…건설 인력시장 귀한몸 된 이주노동자

코로나19 탓에 이주노동자 급감하며 인력 쟁탈전까지 벌어져

일당 20만원에도 인력 못 구해…"제값 받고 좋은 현장 골라가"

(서울=연합뉴스) 이상서 기자 = "갈수록 사람 구하기가 더 힘들어집니다. 동트기 전에는 현장으로 보내야 하는데…"

3일 오전 4시께 전국 최대 규모의 인력시장인 서울 남구로역 근처에서 만난 인력업체 실장 박모(51) 씨는 "지난해 초까지만 하더라도 이주노동자를 중심으로 매일 1천 명 이상이 모여들었던 곳"이라며 "최근 들어 나아지긴 했지만, 한창때보다 그 규모가 70∼80% 수준으로 줄었다"고 말했다.

새벽 거리 메운 외국인 근로자들
3일 오전 4시께 서울 남구로역 인근 인력시장에서 일자리를 찾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모여 있다. [촬영 이상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장기화로 외국인 근로자가 크게 줄면서 이들이 주로 종사하는 분야 중 하나인 건설 현장에서 '귀한 몸'이 되고 있다.

법무부에 따르면 9월 기준 고용허가제(E-9), 방문취업(H-2) 등의 자격으로 체류하는 이주노동자는 35만2천여 명으로 1년 전보다 8만 명 가까이 급감했다.

고용허가제는 취업 절차를 밟고 입국한 외국인이 산업이나 농어촌 현장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허용한 제도이다. 방문취업은 중국 등 외국 국적 동포를 대상으로 건설업이나 제조업 등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남구로역 근처에서 10년째 인력업체를 운영하는 김모 씨는 "과거 한국인과 외국인의 비율이 5대 5였다면 지금은 3대 7 정도로 기울었다"며 "외국인은 중국 동포와 조선족 중심으로 구성됐고, 최근에는 한족의 비중이 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내국인의 경우 '취업은 쉽고, 돈도 더 주고, 덜 힘들다'는 소문이 난 배달업으로 많이 빠진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그는 "코로나19 사태 이후 체류 외국인도 줄면서 인력업체마다 인력 확보에 혈안이 돼 있다"며 "특히 숙련직 기술자의 경우 '내일도 출근해 달라'고 부탁해야 할 판"이라고 했다.

한 인력사무소 게시판에는 '내일 비가 와도 꼭 나와주세요! 부탁드립니다!'라는 호소문이 붙어있었다.

'비가 와도 일해주세요'
3일 오전 4시께 서울 남구로역 인근 한 인력사무소 게시판에 붙은 호소문. [촬영 이상서]

지난해 이 근처에 문을 연 편의점주 A씨는 "영업 초반에만 해도 담배 사러 온 손님들로 왁자지껄했다"며 "연초보다는 나아지긴 했으나 한창때에 비하면 썰렁한 편"이라고 전했다.

이 때문에 인력 담당자 간에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도 종종 눈에 띄었다.

인력업체에서 일하는 B씨는 "건설사에 약속한 인원을 맞춰놨는데 다른 사무소에서 일당을 더 불러서 채갔다"며 "아무리 그래도 상도가 있는데…"라고 힐난했다.

오전 5시가 넘어가면서 근로자와 이들을 싣고자 대기 중인 승합차 수십 대, 인력업체 관계자 등이 뒤엉켜 '몸값'을 흥정하는 모습이 곳곳에서 연출됐다.

2000년대 초부터 이곳에서 인력업체를 운영해온 50대 남성은 "구직자가 넉넉하던 시절에야 아쉬울 게 없었지만, 이제는 일해달라고 사정해야 할 판"이라며 "임금이 맞지 않으면 아예 일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경우도 많다"고 전했다.

예전에는 외국인 숙련 기술자는 24만원 안팎, 잡부는 12만∼15만원 가량에 일당이 형성됐으나, 최근에는 이보다 10∼20%는 올랐다고 한다.

이날 경기도 의정부의 한 건설 현장에 나가기로 했다는 조선족 김모(44) 씨는 "용접일만 20년을 했고, 오늘 일당은 20만원이 좀 넘게 받기로 했다"며 "일도 능숙하고 내 기술에 대한 자부심도 있어 일당을 낮춰서 일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새벽 인력시장의 외국인 근로자들
3일 오전 4시께 서울 남구로역 인근 인력시장에서 일자리를 찾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모여 있다. [촬영 이상서]

2011년 한국에 들어와 줄곧 건설업에 종사했다는 중국 동포 이모(41) 씨는 "코로나19로 삶은 더 팍팍해지긴 했지만, 내 가치를 인정받은 기회가 되더라"며 "요즘에는 노동 강도가 낮고, (거리가 먼 지방이 아닌) 서울에 있는 현장을 골라갈 수 있다"고 말했다.

오전 7시가 넘어가자 눈에 띄게 인원이 줄기 시작했다.

인력업체 관계자는 "건설 경기가 불황이라고 하지만 일할 사람도 줄면서 구인난은 여전하다"며 "새벽에 나와서 빈손으로 집에 들어가면 모두 손해 아니냐. 서로 타협 좀 했으면 좋겠다"고 푸념했다.

shlamazel@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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