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조선의 글로벌 리더 김대건과 최양업의 꿈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조선의 글로벌 리더 김대건과 최양업의 꿈
  • 이희용
  • 승인 2020.12.21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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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조선의 글로벌 리더 김대건과 최양업의 꿈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
2021년 탄생 200주년을 맞는 한국인 최초의 신부 김대건(왼쪽)과 두 번째 신부 최양업 초상화. 김 신부는 '피의 순교자', 최 신부는 '땀의 순교자'로 불린다.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파리외방선교회의 피에르 모방 신부는 1835년 1월 서양인 천주교 사제로는 처음으로 조선에 들어와 사목 활동을 펼쳤다. 정약용의 조카 정하상 바오로의 안내로 서울에 자리 잡고 1년 만에 신도 수를 6천 명에서 9천 명으로 늘렸다. 그는 교세를 더욱 넓히려면 조선인 사제가 있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후보를 물색했다.

선발 기준은 때 묻지 않은 소년일 것, 천주교 집안일 것, 신앙심이 깊고 본인은 물론 가족도 신부가 되기를 바랄 것, 건강하고 근면할 것 4가지였다. 이에 따라 뽑힌 세 소년이 각각 충남 청양·홍성·당진 출신인 김대건 안드레아,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였다. 최방제는 1820년생, 나머지 둘은 1821년생 동갑내기였다. 최양업은 최방제와 4촌 간이었고, 그의 외조부가 김대건 할머니와 친남매여서 김대건과는 6촌 간이었다.

장긍선 작 '순교와 선교'
장긍선 신부가 2015년 가톨릭대 개교 160주년을 기념해 그린 성화 '순교와 선교'. 왼쪽이 한국 천주교 순교의 상징인 김대건 신부고 오른쪽이 선교의 상징 최양업 신부다.

1836년 2월 최양업이 가장 먼저 서울 뒷골(현 중구 주교동)의 모방 신부 은신처에서 천주교 교리와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최방제와 김대건은 각각 3월과 7월에 합류했다. 그해 12월 세 소년은 압록강을 건넌 뒤 중국을 도보로 종단해 당시 포르투갈이 점령한 마카오(澳門)에 이듬해 6월 7일 도착했다.

이들은 파리외방전교회가 마카오에 임시로 세운 조선신학교에서 천주교 신학과 철학, 라틴어 등을 배웠다. 비록 중국 땅이었지만 한국인으로는 처음 서양 학문을 배우려고 외국에 나간 것이다. 최초의 서양 유학생 유길준이 미국 덤머고등학교에 입학한 해보다 47년 앞섰다.

교황의 김대건 탄생 200주년 축복 메시지
프란치스코 교황이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을 맞아 이탈리아어로 쓴 친필 축복 메시지. [주교황청 한국대사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신학교 교장이던 칼레리 신부는 파리신학교에 보낸 편지에서 "조선의 학생들은 훌륭한 사제로서의 덕목을 갖췄다. 신심과 겸손, 면학심, 스승에 대한 존경 등 모든 면에서 완벽하다"고 극찬했다. 그러나 불과 5개월 만에 최방제는 열병을 앓다가 선종(善終)했다. 1839년에는 마카오에서 민란이 일어나 김대건과 최양업은 교수 신부들과 4월부터 11월까지 필리핀으로 피신했다. 이때 조선에서는 기해박해(己亥迫害)로 둘의 부모가 모두 순교했다.

김대건과 최양업은 1842년 각기 다른 배를 타고 마카오를 떠났다. 조선 원정을 앞둔 프랑스 함대의 세실 제독이 조선 신학생을 통역으로 쓰겠다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신부와 신학생도 이를 조선 입국 기회로 활용하려 했다. 당시 조선에는 기해박해로 앵베르 주교와 모방·샤스탕 신부가 순교해 사제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린이와 손잡은 교황과 김대건 신부
충남 당진시는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을 기념해 김대건 신부 탄생지인 솔뫼성지 입구에 토피어리를 꾸며놓았다. 프란치스코 교황과 김대건 신부가 한복 차림의 남녀 어린이와 손잡고 환하게 웃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그러나 그해 8월 영국과 청나라의 난징(南京)조약이 체결돼 세실의 원정 계획은 무산됐다. 둘은 각기 귀국을 시도하다가 중국 지린(吉林)성 창춘(長春)시 샤오바자쯔(小八家子)에서 다시 만났다. 여기서 학업을 이어가며 1844년 12월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에게 부제품을 받았다. 이후 둘의 행로는 엇갈렸다.

김대건은 1845년 1월 서울 잠입에 성공했다. 무너진 교회를 재건하고 프랑스 선교사들의 입국을 준비한 뒤 중국 상하이(上海)로 돌아갔다. 페레올 주교는 조선에 들어가기 전에 만 24세를 맞는 김대건을 신부에 임명했다. 1845년 8월 17일 상하이 진자샹(金家港)성당에서 조선인 최초의 사제가 탄생했다. 이승훈 베드로가 1784년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세례를 받은 지 61년 만의 경사였다.

최양업 신부 동상
충북 제천의 배론성지에 세워진 최양업 신부 동상. 바로 옆에 최 신부의 묘소가 자리 잡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 사진]

김대건은 그해 10월 12일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를 배에 태우고 제주도에 도착했다. 충남 강경을 거쳐 서울에 들어온 뒤 조선교구 부교구장을 맡아 활발한 전교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선교사 입국 경로를 개척하고자 중국 어선을 통해 파리외방전교회에 조선 지도와 편지를 보내려다가 1846년 6월 5일 황해도 옹진반도 인근 순위도에서 붙잡혔다.

문초 끝에 천주교 신부란 사실이 밝혀졌으나 조선 조정은 그를 곧바로 처형하지 않았다. 라틴어, 프랑스어, 중국어 등에 능통할 뿐 아니라 서양 사정에 밝아 쓸모가 많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옥중에서도 조정의 요청에 따라 세계 지리 편람을 저술하고 영국제 세계지도를 번역해주기도 했다. 김대건이 깃털 달린 펜으로 서양 문자를 써 보이자 관리들이 마술이라며 감탄했다는 일화도 있다.

기뻐하는 김대건 신부 기념사업 관계자들
유흥식 천주교 대전교구 주교(오른쪽 세 번째)와 김홍장 충남 당진시장(오른쪽 네 번째) 등이 11월 14일 유네스코 본부가 있는 프랑스 파리에서 김대건 신부의 '2021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 선정을 기뻐하며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당진시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조선 조정은 그를 회유하려고 혹독하게 고문하는 한편 "천주교만 버리면 죄를 묻지 않는 것은 물론 벼슬까지 내리겠다"고 제안했으나 김대건은 배교(背敎)를 거부하고 9월 16일 서울 새남터에서 신도 8명과 함께 참수됐다. 김대건을 비롯한 병오박해(丙午迫害) 순교자들은 1925년 복자품을 거쳐 1984년 성인품에 올랐다. 김대건이 사제로 활동한 것은 1년 남짓밖에 되지 않으나 한국천주교회는 그를 성직자들의 대주보(大主保·수호성인과 비슷한 뜻)로 삼고 있다.

'피의 순교자' 김대건에게 견주어 최양업은 '땀의 순교자', 혹은 백색 순교자라고 불린다. 1849년 4월 15일 두 번째 한국인 신부가 된 뒤 그해 12월 입국해 12년간 조선 전역을 누비며 선교와 사목, 번역과 저술 등에 힘쓰다가 과로로 1861년 순직했다. 순교자를 제외하고는 한국인 가운데 처음으로 교황청이 시복(諡福) 절차에 들어가 덕행 심사를 마친 뒤 2016년 복자의 전 단계인 가경자(可敬者)로 선포했으며, 기적 심사를 남겨 두고 있다.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 희년 기념 미사
한국천주교주교회의가 11월 29일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당신이 천주교인이오'를 주제로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 희년(禧年)의 시작을 알리는 미사를 올리고 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제공. 재배포 및 DB 금지]

내년은 김대건과 최양업 신부 탄생 200주년이다. 유네스코는 평등사상과 박애주의를 실천하고 국제 상호이해에 앞장선 김대건 신부의 삶이 유네스코의 이념과 가치에 부합한다고 판단해 그를 2021년 세계기념인물로 선정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지난 11월 29일부터 내년 11월 27일까지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탄생 200주년 희년(禧年·Jubilee)'으로 선포한 뒤 다채로운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탄생지(솔뫼성지)인 당진시, 묘소(미리내성지)가 있는 경기도 안성시와 사목활동지(은이성지) 용인시 등도 순례길을 조성하고 캐릭터를 개발하는 등 현양 사업에 나서고 있다. 최양업 신부 시복 기원 미사와 그의 일대기를 오페라로 꾸민 '길 위의 천국' 상연도 예정돼 있다.

천주교는 조선에 또 하나의 새로운 종교만은 아니었다. 18∼19세기 조선은 천주교란 창을 통해 서양과 만났고, 서양은 선교사들의 눈으로 조선을 알게 됐다. 김대건과 최양업도 단순한 신앙인에 그치지 않았다. 선진 학문과 사상에 눈뜬 글로벌 리더였고, 민중의 삶을 바꾸려고 한 개혁운동가였다. 이번 주 금요일은 희년에 맞는 크리스마스다. 천주교인이 아니더라도 예수 탄생의 의미와 마카오로 떠난 세 조선 소년의 꿈을 되새겨보자.

hee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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