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북미 원주민 재앙의 씨앗…메이플라워호 출항 400주년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북미 원주민 재앙의 씨앗…메이플라워호 출항 400주년
  • 이희용
  • 승인 2020.09.0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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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의 글로벌시대] 북미 원주민 재앙의 씨앗…메이플라워호 출항 400주년

영국 청교도 102명이 1620년 9월 16일 잉글랜드 남서부 플리머스에서 메이플라워호에 오르기 위해 작은 배에 타고 있다. [출처 위키피디아]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우리는 대영제국 국왕 제임스 1세의 충실한 신민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기독교 신앙의 진흥, 국왕과 국가의 명예를 위해 버지니아 북부에 최초의 식민지를 건설하고자 항해에 나섰다. 이러한 목적의 달성을 촉진하고 개척지에서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나님과 서로 앞에 엄숙하게 계약을 체결하며 우리 스스로 민간 정치체제를 결성하기로 결정했다. 우리 식민지의 총체적인 이익을 위해 식민지 사정에 가장 잘 맞는다고 생각되는 정당하고 평등한 헌법과 법률, 조례, 직책을 만들어 순종할 것을 약속한다."

1620년 9월 16일(당시 영국이 쓰던 율리우스력으로는 9월 6일) 잉글랜드 남서부 플리머스를 출항한 메이플라워호의 승객 102명 가운데 41명이 서명한 '메이플라워 서약'이다. 영국 식민지 개발회사 버지니아사와 계약을 맺고 이민선을 탄 이들은 미국 허드슨강 하구 버지니아주에 도착할 예정이었으나 풍랑을 만나 항로를 이탈하는 바람에 1천㎞나 북쪽으로 떨어진 매사추세츠주 플리머스에 11월 21일 닻을 내렸다. 영국 왕실로부터 정착 허가를 받은 땅이 아니어서 일부가 불만을 제기하자 선상에서 독립된 식민정부를 만들자고 약속했다. 여기에 담긴 자치·민주·평등의 원칙은 다른 북미대륙 식민지에도 적용돼 아메리카합중국(미국) 독립선언의 토대가 됐다.

메이플라워 서약 필사본. 윌리엄 브래드퍼드가 쓴 것으로 미국 매사추세츠주 주립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출처 위키백과]

16세기 유럽대륙에 종교개혁의 불길이 타오르자 영국으로도 번져 신·구교 간에 살육전이 벌어졌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가톨릭과 개신교를 융합한 국교회(성공회)를 정착시키며 화해를 꾀했다. 그러나 뒤이어 즉위한 제임스 1세는 철저한 개혁을 요구하는 청교도(淸敎徒·Puritan)를 탄압했다. 이를 피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향한 청교도들을 '순례자의 시조들'(Pilgrim Fathers)이라고 부른다.

이들보다 앞서 미국 땅을 밟은 영국 이주민도 있었다. 월터 롤리는 1585년 로어노크섬을 식민지로 삼고 인근 땅을 처녀인 엘리자베스 1세에게 바친다는 뜻으로 버지니아로 명명했다. 버지니아사가 모집해 수전 콘스탄트·갓프리드·디스커버리 세 척의 배를 나눠 타고 온 104명(승선 때는 144명)은 1607년 4월 26일 버지니아주 체서피크만에 도착해 당시 국왕의 이름을 딴 정착촌 제임스타운을 건설했다. 하지만 종교의 자유를 찾아 집단으로 이민하고 자체 규약을 맺어 공동체를 이룬 것은 메이플라워호 승객들이 처음이어서 이들을 미국 이민자의 조상으로 꼽는다.

메이플라워호에서 지도자 존 카버가 서약에 서명하고 있다. [출처 위키피디아]

순례자의 시조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다. 목표로 했던 곳이 아니어서 아무 정보도 없고 도움을 청할 사람도 없었다. 더욱이 오랜 항해에 지쳐 대부분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대부분 배에서 지내며 겨울을 보냈는데 46명은 이듬해 봄을 맞지 못한 채 숨지고 말았다.

이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은 원주민(아메리카 인디언) 왐파노아그족이었다. 사슴과 칠면조 고기를 선물하는가 하면 집짓기와 고기잡이를 가르쳐주기도 했다. 풍토에 맞지 않는 유럽 작물의 종자 대신 옥수수 씨앗을 주고 재배법도 전수했다. 1621년 가을 이주민들은 첫 수확물을 거두자 원주민들을 초청해 잔치를 벌였다. 11월 넷째 목요일부터 주말까지 이어지는 미국 추수감사절 축제는 수확기에 사흘간 먹고 마시는 원주민 전통을 본뜬 것이다.

이주민들이 도착 이듬해 가을 첫 수확물을 거둔 뒤 도움을 준 원주민을 초청해 잔치를 벌이고 있다. [출처 위키피디아]

이주민의 지도자는 존 카버였다. 종교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 레이던으로 이주했다가 자본주의의 타락을 목격하고 신대륙에 순수한 신앙 공동체를 건설하기로 마음먹었다. 메이플라워 서약을 주도하고 초대 지사로 선출됐다. 이듬해 3월 왐파노아그족 추장과 평화협정을 맺고 정착에 힘썼으나 1개월 뒤 들판에서 일하다가 쓰러져 숨을 거뒀다.

후계자는 카버와 함께 레이던에서 생활했던 윌리엄 브래드퍼드였다. 세 차례나 지사로 뽑혀 정착촌의 기반을 마련했다. 회고록 '플리머스 플랜테이션에 대해'를 남겨 '미국 역사의 아버지'이자 '미국 문학의 선구자'로 불린다. 브래드퍼드는 공동 생산·분배의 공동체를 지향한 카버와 달리 가구별로 토지를 나누고 각기 경작하도록 해 생산성을 높였다.

2012년 12월 5일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원주민 부족장 연례회의에서 부족장들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원주민은 이주민에게 생명의 은인이었으나 이주민은 원주민에게 재앙이었다. 원주민은 그들의 전통에 따라 낯선 이들을 호의로 대했지만, 이주민 눈에 원주민은 정복하고 타도해야 할 야만인이자 이교도였다. 이주민들은 경작지를 넓히다가 충돌이 빚어지자 원주민들을 총으로 학살했다. 이주민과 함께 들어온 감염병 세균도 면역력이 없는 원주민을 몰살시켰다. 이주민은 이 모든 과정을 신의 은총으로 여기며 감사 기도를 올렸다.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도착할 당시 3천만 명으로 추정되던 북아메리카 원주민은 오늘날 10분의 1도 채 남지 않았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끌려온 흑인의 후예가 미국 대통령 자리에까지 오른 것과 달리 원주민 대부분은 자본주의 생활방식에 적응하지 못한 채 보호구역에서 힘겹게 명맥을 잇고 있다.

지난 3년간 1천120만 달러(약 134억 원)를 들여 복원 수리를 마친 메이플라워 2호가 미국 매사추세츠주 플리머스항으로 들어오고 있다. 1957년 영국이 선물한 이 복제선은 플리머스 주립공원에 전시돼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메이플라워호는 무게 180t, 길이 27.5m에 돛 3개를 갖춘 목제 범선이다. 유럽의 주요 도시를 돌며 포도주를 운반하던 상선이었는데, 청교도들을 싣고 대서양을 건너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크리스토퍼 존스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과 함께 1621년 4월 15일 미국을 떠나 영국으로 귀환한 뒤 1623년 해체됐다. 메이플라워호 출항 400주년을 앞두고 미국은 1957년 영국이 선물한 복제선 메이플라워 2호의 복원 수리를 최근 마쳤으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 여파로 400주년 기념행사를 미룬 상태다.

미국 원주민들은 1975년부터 추수감사절에 반(反)추수감사절(Unthanksgiving Day) 행사를 열어 억울하게 죽은 조상들을 추모하고 있다. 2005년에는 원주민 강경파들이 독립을 요구하며 1969년 11월부터 19개월간 점거농성을 벌였던 샌프란시스코 앨커트래즈섬을 찾아 기념식을 치르며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이 아니라 추수강탈절(Thankstaking Day)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제는 우리도 메이플라워호 출항으로 시작된 영국인의 미국 이주사를 이주민만이 아니라 원주민의 시선으로도 볼 필요가 있다.

hee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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