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한국에 모범 정착한 '인요한 친할아버지' 사망 60주기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한국에 모범 정착한 '인요한 친할아버지' 사망 60주기
  • 이희용
  • 승인 2020.08.0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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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의 글로벌시대] 한국에 모범 정착한 '인요한 친할아버지' 사망 60주기

독립유공자이자 한국 린튼 가문의 시조 윌리엄 린튼(인돈).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TV 출연 등으로 친숙한 인요한(미국명 존 린튼) 연세대 의과대 교수 친할아버지인 윌리엄 린튼(한국명 인돈)을 아시나요."

개항 후 우리나라에 정착한 서양 이주민 가운데 롤모델 집안을 꼽으라면 언더우드와 린튼 가문이 맨 앞자리를 다툰다. 그들은 모두 미국에서 선교사로 건너와 근대교육과 근대의학의 기틀을 다지고 이들 가문 모두 대대로 한국에 봉사하는 삶을 살아왔다.

13일은 한국 린튼 가문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윌리엄 린튼의 60주년 기일이다. 인돈은 1912년 최연소(21세) 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와 인재 양성에 힘쓰는 한편 독립운동에도 기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2010년 3월 1일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열린 제91주년 3·1절 기념식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고 윌리엄 린튼에게 추서한 건국훈장 애족장을 차남 유진 린튼에게 전달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부계 혈통으로만 따지면 인돈의 증손자까지 포함해 4대째 한국에 살고 있다. 그러나 한국 린튼 가문의 역사는 19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모계 혈통까지 합쳐 5대째이다. 125년 전 한국 땅을 밟은 선교사 유진 벨(한국명 배유지)이 인돈의 장인이다.

1885년 이 땅에 개신교 선교의 씨앗을 뿌린 미국 북장로교 소속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한국명 원두우)는 선교사를 더 보내 달라고 호소했다. 이에 호응해 미국 남장로교는 1892년 호남 지역에 선교사 7명을 파송했다. 초기에 북미와 호주 개신교 선교단체는 우리나라를 지역별로 나눠 전도에 나섰는데, 미국 남장로교는 호남과 충청 남부를 맡았다.

유진 벨 선교사가 아내 로티, 아들 헨리, 딸 살럿(왼쪽 위부터 시계방향)과 함께 1901년 전남 목포 집 앞에서 찍은 사진. [유진벨재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27세의 유진 벨은 남장로교 선교사 2진으로 1895년 4월 9일 입국했다. 그해 10월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에게 시해돼 고종이 공포에 휩싸이자 호머 헐버트, 언더우드 등과 조를 짜서 경복궁의 임금 침전을 지켰다. 광폭한 일본도 외교 문제를 우려해 서양인을 해치지는 못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유진 벨은 목포에 양동교회를 세우고 정명학교와 영흥학교를 설립하는 데 힘을 보탰다. 1904년에는 광주로 옮겨 양림교회를 개척해 '호남 선교의 아버지'로 불렸다. 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를 개교하는가 하면 광주제중원(현 광주기독병원) 개원에도 산파 역할을 했다.

2018년 6월 19일 문을 연 전북 군산의 3·1운동 100주년 기념관. 군산 3·5 만세운동을 기념하고자 옛 영명학교의 모습을 본떠 지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인돈은 명문 조지아공대 전기공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였다. 제너럴일렉트릭 입사가 예정돼 있었으나 한국에서 선교하다가 귀국한 존 프레스턴의 강연을 듣고 감명받아 한국행을 결심했다. 1912년 입국해 군산 영명학교(현 군산제일중고)에서 영어와 성경 과목을 가르치다가 1917년 교장을 맡았다.

1919년 서울에서 시작된 3·1운동의 불길은 3월 5일 군산에서도 타올랐다. 한강 이남에서는 최초의 만세 시위였다. 영명학교 기숙사와 교사 사택 등에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찍어냈고, 영명학교·멜본딘여학교(현 영광여중고) 학생과 궁멀교회(현 구암교회) 신도들이 시위대의 주축 역할을 했다. 인돈은 뒤에서 이를 도왔다.

전북 군산의 구암교회. 1919년 한강 이남 최초의 독립만세운동이 군산에서 일어날 때 영명학교와 함께 요람 구실을 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그해 5월에는 미국 애틀랜타에서 열린 평신도대회에 참석해 3·1운동의 정당성을 알리고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는 강연을 했다. 현지 신문 '애틀랜타 저널'에도 대한 독립의 필요성을 호소하는 글을 기고했다. 전주 기전여학교에 이어 신흥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던 1937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자 학교는 문을 닫고 1940년 미국으로 추방됐다.

유진 벨의 딸 샬럿 위더스푼(한국명 인사례)과는 1922년 일본 고베(神戶)에서 결혼했다. 인사례는 1899년 목포에서 태어났으나 2살 때 어머니를 여읜 뒤 미국에서 자라다가 1912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남편과 함께 교육과 선교에 힘쓰며 기전여학교 교장도 맡았다. 평소 한복을 즐겨 입고 자식들에게도 지게 지는 법 등 한국식 생활풍습을 익히게 했다고 한다.

윌리엄 린튼(인돈)과 유진 벨의 딸 샬럿 위더스푼의 결혼식 사진. [유진벨재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인돈 부부는 광복 이듬해 한국을 다시 찾아 학교를 재건했다. 인돈이 일본 신사가 있던 자리에 공중화장실을 지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한국전쟁 중에도 한국을 떠나지 않다가 1955년 대전으로 이주해 이듬해 대전기독학관을 세웠다. 1959년 4년제 대전대학(현 한남대)으로 승격하며 인돈은 초대 학장에 취임했다. 1960년 지병이 악화해 미국에서 치료받던 중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인돈 부부는 아들 넷을 두었다. 3남 휴 린튼(한국명 인휴)은 6·25 때 미국 해군 장교로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했다. 미국에서 대학과 신학교를 졸업하고 부인과 함께 한국에 들어와 전남 섬 지방을 돌며 선교 활동을 펼쳤다. 1960년 순천에 큰 수해가 났을 때 결핵이 유행하자 결핵 퇴치를 위한 진료소와 요양원을 세웠다. 4남 드와이트 린튼(한국명 인도아)도 한국에서 의료봉사에 나서고 호남신학대 학장을 지냈다.

스티브 린튼(인세반) 유진벨재단 회장이 2019년 10월 17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북한 방문 특별보고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인휴 부부는 미국에서 세 아들을 낳고 한국에서 3남매를 더 얻었다. 차남 스티브 린튼(한국명 인세반) 유진벨재단 회장은 연세대 철학과와 미국 컬럼비아대를 거쳐 컬럼비아대 한국학 교수를 지냈다. 유진 벨 선교 100주년을 맞아 1995년 재단을 세우고 북한 돕기에 앞장서고 있다. 1979년 이후 80여 차례나 방북해 북한 사정에 가장 밝은 미국인으로 꼽힌다.

TV 출연 등으로 친숙한 존 린튼(한국명 인요한) 연세대 의과대 교수이자 연세대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은 5남이자 막내다. 전주에서 태어나 순천과 대전에서 자랐고 연세대 의대를 다녔다. 본과 1학년 때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현지로 달려가 외신기자들을 상대로 통역을 해주다가 군사정권으로부터 미움을 사기도 했다.

2016년 3월 5일 존 린튼(인요한) 연세대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맨 오른쪽)이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미술관에 새로 들어설 유진 벨 선교기념관을 미리 둘러보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1987년 서양인 최초로 의사 국가고시에 합격했고 미국에서 전문의 과정을 밟아 미국 의사 면허도 얻었다. 1984년 부친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숨지자 보상금으로 응급처치 시설을 갖춘 전문 구급차를 국내 최초로 제작해 1993년 순천소방서에 기증하기도 했다. 2005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아 조손이 함께 수훈 국가유공자가 됐다. 그동안 미국만 갖고 있다가 2012년에는 특별귀화 1호로 한국 국적도 얻었다. 그가 순천 인 씨의 시조다.

언더우드와 함께 한국에 모범 이주민 가문을 연 윌리엄 린튼의 60주기를 맞아 이들의 대를 이은 헌신과 봉사를 되새기며 우리가 이주민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hee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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