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6·25 무패 신화' 에티오피아 강뉴부대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6·25 무패 신화' 에티오피아 강뉴부대
  • 이희용
  • 승인 2020.06.22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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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의 글로벌시대] '6·25 무패 신화' 에티오피아 강뉴부대

유엔군 일원으로 한국전에 참전한 에티오피아 강뉴부대. [한국해비타트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한반도에서 전면전이 벌어지자 유엔은 신속하게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해 유엔군 참전을 결정했다. 전투병을 파견한 나라는 모두 16개국이었다. 미국·영국·캐나다 등 서방 선진국들이 주축을 이뤘지만 적은 병력으로 가장 눈부신 전과를 올린 부대는 에티오피아군이었다. 무려 253전 253승이라는 거짓말 같은 불멸의 기록을 세웠다.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유엔의 파병 요청을 받자 황실 근위병을 중심으로 보병 1개 대대를 편성하고 '강뉴(칵뉴·Kagnew)부대'란 이름을 하사했다. '강뉴'는 에티오피아어(암하라어)로 '혼돈에서 질서를 확립하다', 또는 '초전박살'(初戰撲殺)'이란 뜻이다. 셀라시에는 출정식에서 장병들에게 "이길 때까지 싸워라. 그렇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싸워라"란 특명을 내렸다.

1968년 방한한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강원도 춘천의 에티오피아 참전기념탑에 헌화하고 있다. [월드투게더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셀라시에가 내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1만㎞나 멀리 떨어진 한국을 위해 최정예병을 보낸 것은 자신도 나라를 빼앗겼다가 우방의 도움으로 되찾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에티오피아는 1935년 이탈리아의 침공을 받자 국제연맹에 지원을 호소했다. 그러나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 국토를 점령당하고 셀라시에는 영국으로 망명했다. 수많은 희생을 치른 끝에 1941년 그가 수단에서 조직한 에티오피아 망명군과 영국군이 이탈리아군을 몰아냈다.

1951년 7월 한국 땅을 밟은 강뉴부대는 미군 7사단 32연대에 배속돼 그해 9월 강원도 화천 적근산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며 이듬해 10월 '철의 삼각지' 공방전에서 단 한 차례도 고지를 내주지 않았다. 1953년 7월 종전 때까지 연인원 3천518명(1956년까지 주둔 기간을 포함하면 6천37명)이 참전해 124명이 전사하고 536명이 부상했으나 포로는 한 명도 없었다. 부대원 모두 황제의 특명을 지킨 것이다. 전우의 시신도 모두 수습해 돌아가 부산 유엔군 묘역에는 에티오피아군 병사의 무덤이 하나도 없다.

한국전에 참전한 에티오피아 군인들이 경기도 동두천 보화원 어린이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유엔한국참전국협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포성(砲聲)이 멈춘 뒤에도 강뉴부대는 1956년까지 우리나라에 주둔하며 평화를 지키고 전후 복구를 도왔다. 부대원들은 월급을 모아 1953년 경기도 동두천에 '보화원'이란 이름의 고아원(보육원)을 세운 뒤 전쟁고아들을 보살폈다. '보화'(Bowha)는 암하라어로 '하느님의 은혜'란 뜻이다.

에티오피아 전사들의 활약상을 세상에 알린 사람은 그리스인 종군기자 키몬 스코르딜스다. 그는 1954년 일본 도쿄(東京)에서 출간한 강뉴부대 참전기 'Kagnew Battalions' 서문에서 "한국전 최전선에서 에티오피아군이 싸우는 모습을 목격하고 엄숙한 사명감으로 세계 평화에 기여한 이들의 공헌도를 증언하고자 책을 쓰게 됐다"고 밝혔다. 이 책은 한국국제협력단(KOICA) 에티오피아 사무소장 송인엽 씨에 의해 2010년 우리말로 옮겨 발간됐다.

한국전에 두 차례 참전해 2017년 8월 '이달의 전쟁영웅'으로 선정된 에티오피아 구르무 담보바 이병(왼쪽). [국가보훈처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국가보훈처는 2017년 8월 '이달의 전쟁영웅'으로 강뉴부대원이던 구르무 담보바 이병을 선정했다. 그는 31살의 나이로 1951년 참전해 강원도 화천과 철원 일대에서 무공을 세웠다. 전투 중 허벅지와 엉덩이에 관통상을 입어 고국으로 돌아갔다가 얼마 후 다시 참전했다. 당시 강뉴부대에는 담보바만큼 최첨단 무반동총을 잘 다루는 병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죽음의 공포와 혹한의 고통을 또 겪어야 하는 것이 두려웠으나 한국인들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할 수 없어 두 번째 파병 명령도 기꺼이 받아들였다.

에티오피아 참전용사 가운데는 1960년 이탈리아 로마와 1964년 일본 도쿄에서 올림픽 사상 최초로 마라톤 2연패의 위업을 이룬 비킬라 아베베도 있었다. 2진으로 한국에 들어온 그는 당시 나이가 19살이어서 최전선에는 투입되지 않고 부대장 호위병으로 복무했다.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다는 평을 받았으며, 자신도 한국전 참전을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2013년 6월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저격능선 전적비를 찾은 에티오피아군 노병이 한국전 참전 당시의 사진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그러나 참전용사들의 운명은 순탄하지 못했다. 에티오피아는 1970년대 들어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다가 치솟는 물가와 고위층 부정부패 등이 겹쳐 1974년 공산 쿠데타를 맞았다. 셀라시에 황제는 폐위되고 전쟁영웅으로 칭송받던 참전용사들은 동맹군(공산군)과 싸운 배신자로 몰려 직장에서 쫓겨났다. 1991년 공산 독재정권이 붕괴하고 친서방 정권이 들어섰으나 내전 후유증과 경제정책 실패로 참전용사의 어려움은 계속되고 있다. 현재 에티오피아에 생존한 참전용사는 132명이며 평균연령은 90세다.

국제사회의 도움을 받던 나라에서 유일하게 도움을 주는 나라로 탈바꿈한 한국은 2000년대부터 에티오피아에 본격적으로 보은의 손길을 펼쳤다. 코이카(KOICA), 지방자치단체, 기업, 비정부기구(NGO) 등이 나서 의료시설·학교·복지회관 등을 지어주고 참전용사와 후손에게 생활비와 장학금을 지급하는가 하면 후손들의 한국 유학과 기술교육도 돕고 있다.

주에티오피아 한국대사관이 KOICA, 굿네이버스 등의 관계자가 참석한 가운데 5월 12일 에티오피아 보건부 장관에게 한국산 코로나19 진단키트 등 인도적 지원물자를 전달하고 있다. [주에티오피아 한국대사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사태를 맞아 정부는 지난달 에티오피아 진출 한국 기업, NGO 등과 함께 2만8천300회분의 한국산 코로나19 진단키트 등 인도적 지원물자(약 5억8천만 원 상당)를 보낸 데 이어 '6·25전쟁 70주년 사업추진위원회' 명의로 에티오피아 참전용사협회에 마스크 4만 장을 전달했다.

최근 들어 휴전선을 둘러싼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70년 전 악몽을 먼 옛날 일로만 여길 수만은 없게 됐다. 아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과거를 잊지 말아야 한다. 이역만리 낯선 땅에 파견돼 청춘과 목숨을 바쳐 대한민국을 지켜낸 에티오피아 젊은이들의 헌신을 기억하며 해외 참전용사 돕기 캠페인이나 감사 편지 쓰기 운동에 참여해보는 것도 6·25 70주년 기념일을 뜻깊게 보내는 일일 것이다. (한민족센터 고문)

이희용 연합뉴스 한민족센터 고문

hee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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