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여성 선각자 차미리사와 덕성 창학 100년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여성 선각자 차미리사와 덕성 창학 100년
  • 이희용
  • 승인 2020.04.16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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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여성 선각자 차미리사와 덕성 창학 100년

 

 

미국 유학 시절의 차미리사. [덕성여대 제공]

 

(서울=연합뉴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여러 가지 할 일이 많이 있고 해결해야 할 문제가 허다하지만 교육 문제처럼 큰 문제는 없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교육 문제에서도 가장 급한 것은 여자 교육으로 생각합니다.…사람의 사회라 하는 것은 본래 사나이와 계집 두 가지로 된 것인데 종래에는 계집은 아무 사람다운 값이 없이 살아오지 아니하였습니까.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것은 여자의 큰 수치라고 하나 나는 말하기를 온 인류의 큰 수치라 하겠습니다. 수레 두 바퀴와 같은 남녀의 관계가 종래와 현재에는 한쪽으로 기울어졌으니까 이것을 바로잡고자 하는 것이 곧 여자 교육의 필요로 생각합니다"

여성 선각자 차미리사가 동아일보 1921년 2월 21일 자에 기고한 글이다. 앞서 동아일보 1920년 4월 14일 자에는 "학교를 다니지 못한 가정에 있는 여자들은 편지 한 장도 자신의 손으로 쓰지 못하고 신문 한 장을 마음대로 보지 못한다"면서 "귀 멀고 눈멀고 벙어리 된 자매를 비참한 운명에서 구해 보고자 한다"고 선언했다. 이에 따라 1920년 4월 19일 창립된 단체와 기관이 조선여자교육회와 부인야학강습소다.

 

1930년대 근화여학교의 관훈동 기숙사로 쓰이던 덕우당(德友堂). 1998년 덕성여대가 운니동에서 쌍문동으로 이전할 때 함께 옮겨졌다가 2007년 복원공사에 들어가 2009년 완공됐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차미리사는 아버지 차유호와 어머니 장씨 사이에서 1879년 8월 21일(음력) 서울 아현동에서 태어났다. 원하던 아들이 아니어서 아명을 '섭섭이'라고 불렀다. 1896년 김진옥과 결혼했다가 딸 하나를 얻고 2년 만에 남편과 사별했다. 실의에 빠진 그는 의료선교사 윌리엄 스크랜턴이 지금의 한국은행 자리에 세운 상동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미리사(美理士·Mellisa)란 세례명을 얻고 남편 성을 따서 김미리사란 이름으로 활동하다 1940년대부터 차미리사로 바꿨다.

그러던 중 1900년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가 미국에서 돌아온 것을 보고 유학을 결심했다. 선교사 호머 헐버트의 도움으로 1901년 중국 상하이(上海)의 감리교 학교에서 영어와 신학을 공부한 뒤 1905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항일단체 대동교육회와 대동보국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는가 하면 대동공보 발간에 기여하고 한국부인회를 조직해 회장을 맡았다. 1910년 미주리주 캔자스시티의 스캐리트성경학교에 입학해 학업을 마친 뒤 1912년 귀국했다.

 

양장 차림에 양산을 들고 있는 차미리사. [덕성여대 제공]

 

선교사 조지핀 캠벨이 내자동에 세운 배화학당의 교사 겸 사감으로 일하며 학생에게 신학문을 가르치고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본격 여성 계몽운동에 나설 것을 결심하고 이듬해 조선여자교육회를 발족하고 서울 종로구 도렴동 종다리예배당(현 종교교회)에 부인야학강습소를 열었다.

차미리사 조선여자교육회장은 여자강연대를 꾸려 1921년 6월부터 10월까지 전국 73곳에서 순회강연을 펼쳤다. 그는 강연할 때마다 첫머리에 "전 조선 1천만 여성은 다 내게로 오너라.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성, 과부 된 여성, 남편에게 압제 받는 여성, 천한 데서 사람 구실을 못 하는 여성, 뜨고도 못 보는 무식한 여성들은 다 오면 어두운 눈 광명하게 보여주고 이혼한 남편 다시 돌아오게 해주마"라고 외쳤다.

가는 곳마다 여성들은 물론 남성들에게도 관심을 끌어 건물 밖 마당까지 청중이 몰려들었다. 매일신보는 1921년 7월 9일 자에 서울 남대문을 나서는 순회강연단의 사진을 곁들여 상세한 소식을 전했다. 동아일보도 7월 11일 자에서 "조선 여자계의 일대 광명이며 생명 있는 신운동"이라고 격찬했다.

 

매일신보 1921년 7월 9일자에 실린 여자강연대 기사와 사진. [덕성여대 제공]

 

1923년에는 청진동 한옥집으로 야학강습소를 옮겨 주간반도 신설했다. 이름을 근화학원(槿花學園)이라고 짓고 2년 뒤 근화여학교 인가를 받았다. 차미리사가 내건 창학 이념은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생각하되, 네 생각으로 하여라. 알되, 네가 깨달아 알아라"였다.

차미리사는 조선여자교육회 기관지 '여자시론'(女子時論)을 발간했다. 1927년 김활란·유각경·최은희·주세죽 등과 함께 여성항일구국운동단체 근우회(槿友會) 발기위원으로 참여하고 1929년에는 조선어사전 편찬사업 발기인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조선일보 1934년 2월 11일 자에 실린 근화여학교 사진. 교사를 안국동으로 옮긴 뒤 교직원과 학생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덕성여대 제공]

 

1934년에는 안국동에 있는 2층 목조건물을 사들였다. 갑신정변의 주역 서광범이 살던 집으로 현재 덕성여고가 들어서 있다. 1935년에는 근화여학교를 근화여자실업학교로 개편했다가 1938년 덕성여자실업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일제가 교명에 한민족의 상징인 근화(무궁화)를 못 쓰게 했기 때문이다.

일제의 간섭은 학교 이름에만 머물지 않았다. 차미리사가 민족교육을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총독부 학무국은 압력을 넣어 교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광복 후 1948년 통일정부 수립을 호소하는 문화인 108인 성명에 동참하는 등 사회활동을 이어가다가 1955년 6월 1일 눈을 감았다. 별세한 지 47년 만인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차미리사 제64주기 추도식이 2019년 5월 31일 서울 도봉구 쌍문동 묘소에서 열리고 있다. [덕성여대 제공]

 

그가 이사장으로 물러앉은 덕성여자실업학교는 1945년 덕성고등여학교로 재출범한 뒤 덕성여중고로 이어졌다. 1950년 설립된 덕성여자초급대학은 1952년 4년제 대학으로 승격했다. 덕성학원은 차미리사가 부인야학강습소를 연 1920년 4월 19일을 창학일로 기념한다.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던 애국지사들은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려면 인재 양성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환국 후 앞다퉈 대학 설립에 나섰다. 이시영은 만주 신흥무관학교의 전통을 이은 신흥대(현 경희대)를 설립했고 김창숙은 조선 성균관의 학통을 계승한 성균관대를 재건했다. 이승만은 하와이 동포들의 정성을 모으고 인천시의 협조를 끌어내 인천과 하와이의 머리글자를 딴 인하대 개교를 주도했다. 신익희의 국민대와 경남대, 장형·조희재의 단국대, 유일한의 유한대 등도 독립운동가들이 세운 대학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우정사업본부가 16일 덕성여자대학교 창학 100주년을 맞이해 기념우표 63만 장을 발행했다. [우정사업본부 제공]

 

이 가운데서도 덕성여대는 독립유공자가 3·1정신을 계승해 국내에 설립한 유일한 학교다. 국가보훈처는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에 동조해 만세운동을 벌인 근화여학교 학생 20명과 1931년 비밀결사 독서회를 조직해 제국주의 반대 격문을 배포한 정남이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덕성여대 창학 100주년 기념식은 미뤄졌지만 기념우표를 발행하고 '덕성 100년사'를 편찬하는 등 다양한 기념사업을 펼치고 있다. 세월은 1세기가 흘렀지만 자주적 삶과 주체적 배움을 권면한 차미리사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 (한민족센터 고문)

 

이희용 연합뉴스 한민족센터 고문

 

hee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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