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세계보건의날과 故이종욱 前WHO 사무총장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세계보건의날과 故이종욱 前WHO 사무총장
  • 이희용
  • 승인 2020.04.01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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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세계보건의날과 故이종욱 前WHO 사무총장

한국인 최초로 유엔전문기구 수장을 맡은 故이종욱 제6대 WHO 사무총장이 2003년 스위스 제네바 WHO 본부에서 연설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인류가 전염병 예방을 위해 국가 간 협력의 필요성을 절감한 것은 19세기 들어서였다. 1817년을 시작으로 몇 해씩 간격을 두고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콜레라가 창궐해 수백만명의 목숨을 앗아갔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으로 도시화가 촉진되고 교통 발달과 제국주의 발호로 이동이 늘어남에 따라 전염병 전파 속도가 빨라졌고 범위도 넓어졌다.

1851년 프랑스 파리에서 유럽 12개국 대표가 모여 방역 대책을 논의했다. 그때는 세균의 정체가 밝혀지기 전이어서 뾰족한 예방과 치료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으나 1907년 파리에서 40개국이 국제공중보건처(IOPH)를 출범시키는 토대가 됐다. IOPH와 국제연맹 산하 보건기구와 합쳐져 탄생한 것이 세계보건기구(WHO)다.

WHO 휘장. 유엔 마크 위에 의술의 신을 상징하는 뱀과 지팡이를 그려 넣었다.

올해 초부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모든 대륙을 휩쓸면서 WHO는 뉴스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국제기구가 됐다. 1946년 61개국이 WHO 헌장에 서명한 데 이어 26개국이 비준해 1948년 4월 7일 유엔전문기구로 정식 발족했다. 본부는 스위스 제네바에 있고 회원국은 194개국에 이른다. 우리나라는 1949년 가입했다.

유엔은 WHO 발족일인 4월 7일을 세계보건의날로 정했다. 우리나라는 1952년부터 이날을 기념하다가 1973년 나병의날, 세계적십자의날, 국제간호원의날, 구강의날, 귀의날, 약의날, 눈의날 등 기존의 건강 관련 기념일을 모두 합쳐 국가기념일인 보건의날로 지정했다. 2014년 발효된 국민건강증진법은 4월 7일부터 1주일간(건강주간)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관련 행사와 사업을 펼치도록 명문화했다.

4월 7일 세계보건의날(World Health Day)을 상징하는 로고.

WHO는 건강을 단순히 '질병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신체적·정신적·사회적으로 안녕하고 질병이나 신체적 병약함이 없는 상태'라고 정의하고 있다. 게임이용장애(게임중독)를 2022년부터 질병 분류기준에 포함하기로 한 것도 지난해 5월 WHO 총회의 결정이다. WHO는 건강과 질병의 기준 제시를 비롯해 보건제도 강화 캠페인, 국제위생규칙 시행 감시, 전염병 발생 보고와 공동 대응, 위생통계 수집과 간행, 150여 개국 사무소에 전문가 파견, 의료장비와 약품 제공, 기술 원조 등의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WHO에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발생 초기에 안이하게 대처하다가 뒤늦게 중국의 방역 정책을 칭찬한 것이라든지 일본 요코하마에 정박 중이던 크루즈선 탑승객 감염자를 일본 통계에서 제외한 것이 대표적이다. 화살은 에티오피아 보건부 장관과 외교부 장관을 지낸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사무총장에 집중된다. 그는 WHO 창립 이래 유일한 비의료인인 데다 2017년 중국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아프리카 회원국들의 몰표를 얻어 당선됐기 때문에 더욱 의심을 사고 있다.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WHO 사무총장이 지난 11일 스위스 제네바 WHO 본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해 코로나19의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을 선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인류가 위기에 놓인 가운데 WHO 수장의 전문성과 리더십이 문제로 꼽히다 보니 2005년 과로로 숨진 이종욱 전 사무총장을 아쉽게 여기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이종욱은 2003년 WHO 6대 사무총장에 선출돼 한국인 최초로 유엔전문기구 수장이 됐다. 아시아 출신으로는 일본에 이어 두 번째다.

1945년 4월 12일 서울에서 태어난 이종욱은 경복고와 한양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다가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며 서울대 의대로 진학했다. 1976년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러 경기도 안양의 성라자로마을에 갔다가 1972년부터 이곳에서 자원봉사하던 일본인 가부라키 레이코(鏑木玲子) 씨를 만났다.

마이클 라이언 WHO 긴급준비대응 사무차장이 지난 20일 스위스 제네바 WHO 본부의 긴급준비대응 회의실에 걸린 이종욱 전 WHO 사무총장 초상화 앞에 서 있다. 라이언 사무차장은 이 전 사무총장이 발탁한 인물이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그는 다른 나라까지 와서 헌신하는 모습에 감명받아 청혼했으나 거절당했다. 레이코 씨는 "내가 몸이 자주 아팠고 오랫동안 한센병 환자들과 부대끼며 살아 그 남자까지 불행해지면 어쩌나 불안했다"고 훗날 털어놓았다. 이종욱은 "내가 고쳐주면 되지 무슨 걱정이냐"며 밀어붙여 1979년 결혼했다.

그해 미국 유학을 떠나 하와이주립대 대학원에서 공중보건학을 공부하고 1983년부터 남태평양 사모아의 린든존슨병원에서 한센병 치료와 연구에 매달렸다. 피지의 WHO 남태평양 지역사무처에서도 일하며 '아시아의 슈바이처'로 불렸다. 그 뒤 필리핀 WHO 서태평양 지역사무처 한센병 자문관으로 일하다가 1994년 본부로 옮겨 질병관리국장, 예방백신국장, 결핵국장 등을 역임했다.

2012년 5월 22일 스위스 제네바 유엔 유럽본부에서 열린 이종욱 전 WHO 사무총장의 영문판 전기 출간기념회에서 이 전 사무총장의 부인 가부라키 레이코 여사(왼쪽)와 천펑푸전(마거릿 챈) WHO 사무총장이 손을 잡고 있다. 오른쪽은 임채민 보건복지부 장관과 박상기 주제네바 대표부 대사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예방백신국장 시절에는 소아마비 백신을 보급해 재임 1년 만에 유병률을 세계 인구 1만 명당 한 명 이하로 낮췄다. 미국의 과학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은 그에게 '백신의 황제'란 별칭을 붙였다. 스위스의 테니스 스타 마르티나 힝기스는 7만5천달러(약 9천160만원)를 백신연구기금으로 내놓았다. 결핵국장 시절에는 국제의약품기구를 설립, 약값이 없어 치료를 못 받는 가난한 나라를 도왔다. 북한도 방문해 6만명분의 결핵 치료제를 지원했다.

2003년 1월, 벨기에와 멕시코 후보를 누르고 WHO 사무총장에 당선됐다. 그해엔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이 유행했다. 7월 취임하자마자 전략보건운영센터를 만들어 긴급상황이 발생하면 30분 안에 관계자가 모여 회의를 열 수 있도록 했다. 이 시스템은 훗날 신종플루와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발병 때도 진가를 발휘했다.

스위스 제네바에 자리 잡고 있는 세계보건기구(WHO) 본부. [연합뉴스 자료사진]

그는 재임 시절 본부 사무국 예산과 인력을 줄이는 대신 빈곤지역 의료 지원에 집중했으며, 에이즈 퇴치와 조류독감 치료에 큰 성과를 거뒀다. '컴퓨터 황제' 빌 게이츠는 이종욱을 믿고 WHO에 7억5천만달러(약 9천160억 원)를 지원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2004년 '타임 선정 100인'에도 들었다.

이종욱은 검소한 태도로도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별명이 '행동하는 남자'(Man of Action)일 정도로 1년에 150일, 30만km씩 출장을 다니면서도 "우리가 쓰는 돈에는 가난한 나라가 낸 분담금도 섞여 있으니 아껴야 한다"며 비행기 일등석을 한 번도 타지 않았고, "보건기구 책임자인 만큼 환경을 생각해야 한다"며 고급 승용차를 마다하고 소형 하이브리드차를 탔다. 이종욱의 후임인 홍콩 출신의 천펑푸전(陳馮富珍·마거릿 챈)이 출장비 과다 지출로 논란을 빚은 것과 대조를 이룬다.

2005년 5월 29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영송병들이 이종욱 WHO 사무총장의 영정, 훈장, 유해를 봉송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그러나 임기 5년 가운데 2년이 채 못 된 2005년 5월 22일 뇌경색으로 쓰러져 숨졌다.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오늘 세계는 위대한 인물 하나를 잃었다"고 추모했고,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그는 수백만 명의 건강을 위한 최고의 보건 책임자였다"고 기렸다.

WHO 창립 72주년을 맞는 올해 세계보건의날을 앞두고 그의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진다. 오는 12일은 고 이종욱 박사 탄생 75주년 기념일이고 다음 달 22일은 그의 15주기 기일이다. 그의 열정과 박애정신을 기리며 다시 한번 코로나19 극복 의지를 다짐해보자. (한민족센터 고문)

이희용 연합뉴스 한민족센터 고문.

hee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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