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코로나19 최전선' 대구동산병원과 사과나무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코로나19 최전선' 대구동산병원과 사과나무
  • 이희용
  • 승인 2020.03.11 06: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코로나19 최전선' 대구동산병원과 사과나무

 

 

지난 4일 밤 계명대 대구동산병원에서 의료진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자 병동으로 향하며 의료용품을 건네받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여기에 뿌리 내린 이 사과나무는 1899년 동산의료원 개원 당시 미국에서 들여온 한국 최초 서양 사과나무의 자손목으로, 동산의료원 역사를 말할 뿐만 아니라 대구를 사과의 도시로 만든 의미 있는 생명체이다. 초대 병원장 우드브리지 존슨 박사가 미국 의료선교사로 동산병원에 재임하면서 미국 미주리주에 있는 사과나무를 주문해 이곳에서 재배한 것이 대구 서양 사과나무의 효시이다"

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의 계명대 대구동산병원 구내에는 위 글귀가 새겨진 표석이 서 있고 그 앞에는 수령 90년에 이르는 사과나무가 힌 그루 자라고 있다. 존슨은 부임 이듬해 사택 뒤뜰에 사과나무 72그루를 심은 뒤 묘목을 시민들에게 나눠줬다. 이것이 널리 보급돼 그때까지 재래종 능금을 키우던 대구는 사과의 고장이 됐다. 현재 시조목은 죽고 대구동산병원에 유일하게 남은 2세 나무가 2000년 대구시 보호수 1호로 지정됐다.

 

대구동산병원 구내에 세워진 '사과나무 100년' 표지석. [대구시 제공]

 

대구 사과의 발원지가 된 대구동산병원은 현재 의료진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사투를 벌이는 최전선이다. 지난달 21일 공공병원인 대구의료원과 함께 코로나19 지역거점병원으로 지정돼 246병상을 모두 확진 환자 전용으로 쓰고 있으며, 동산의료원 전 임직원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의사·간호사가 몰려와 치료에 매달리고 있다. 시민들도 성금, 의료품, 도시락, 손편지 등을 보내며 응원과 격려를 보내고 있다.

대구동산병원은 1899년 대구·경북 최초로 근대의술이 펼쳐진 대구 제중원이 모태다. 121년간 지역민과 희로애락을 함께해왔기에 민간병원이지만 임직원이 기꺼이 코로나19 전담치료를 자원했다고 한다. 현지에서는 "그동안 대구시민이 대구동산병원을 품어왔듯이 이제는 대구동산병원이 대구시민을 품었다"며 흐뭇해하고 있다.

 

지난 4일 대구동산병원 식당에서 대한적십자사 봉사자들이 코로나19 확진자 치료로 연일 고생하는 의료진에게 삼계탕과 영양식 등을 전달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의료기관은 1876년 11월 부산에 들어선 제생의원(부산의료원의 전신)이지만 일본군이 운영했기 때문인지 9년 뒤 서울에서 문을 연 제중원을 효시로 꼽는 경우가 더 많다. 엄격히 말하면 제중원은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이자 서양 의료진이 처음 의술을 펼친 곳이다. 미국 북장로회가 파견한 의료선교사 호러스 알렌이 고종의 윤허를 얻어 지금의 헌법재판소 자리(종로구 재동)에 광혜원이란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가 13일 만에 제중원으로 바꿨다.

1893년 영국 출신의 캐나다인 올리버 에이비슨이 부임한 이듬해 조선은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 등으로 재정이 악화해 제중원 운영권을 미국 북장로회에 넘겼다. 에이비슨은 미국 실업가 루이스 세브란스에게서 1만5천 달러의 거금을 지원받아 서울역 앞 연세대재단세브란스빌딩 자리(중구 회현동)에 세브란스병원을 새로 지었다.

 

미국 의료선교사 존슨이 1898년 초가에 차린 대구 제중원의 전신 시약소(施藥所). '미국약방'이란 족자를 내걸었다. [동산의료원 제공]

 

제중원이 국립으로 출발했다가 민간 선교병원으로 바뀌다 보니 아직도 국립서울대병원과 연세대의대 세브란스병원은 서로 제중원의 적통이라고 주장하며 다투고 있다. 세브란스병원과 세브란스의학전문대는 같은 북장로회 소속 호러스 언더우드가 세운 연희전문대(경신학교 후신)와 1957년 통합하며 머리글자를 각각 따 연세대가 됐다.

북장로회는 서울뿐 아니라 평양·대구·선천·재령 등으로 의료사업을 확장하고 미국 남장로회도 광주·목포·군산 등지에 선교병원을 건립했다. 이들은 제중원이라는 이름을 함께 썼는데, 대구 제중원이 대구동산병원의 뿌리가 됐고, 광주 제중원의 후신이 광주기독병원이다. 전주예수병원과 안동성소병원도 각각 미국의 북장로교회와 남장로회가 세운 병원이다.

 

코로나19 지역거점병원인 계명대 대구동산병원 전경. 오른쪽이 본관이고 왼쪽 붉은 벽돌 건물이 국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구관이다. [동산의료원 제공]

 

대구동산병원의 시작은 북장로회 선교사 우드브리지 존슨이 1898년 대구시 중구 남성로에 차린 시약소(施藥所)다. 일반인이 이해하기 쉽도록 '미국약방'이라는 두루마리 족자를 내걸었다. 당시만 해도 특이한 용모의 서양인을 양귀(洋鬼)라고 부르던 시절이고 기독교 신자도 거의 없던 때여서 찾는 이는 많지 않았다고 한다. 이듬해 제중원이라는 간판을 걸고 본격적인 진료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서양 의술이 낯설어 선뜻 몸을 맡기는 사람이 드물었다. 그러나 청진기나 주사기 등 서양식 의료기구들을 신기하게 여겨 구경꾼은 많았다고 한다. 치료에 효과를 본 사람이 하나둘씩 늘어나자 소문이 퍼져 나중에는 대구 근교에서도 달구지를 타고 왔다. 존슨은 1909년 6월 27일 제왕절개수술로 아기와 엄마의 생명을 살려 높은 명성을 얻었다. 한센병을 치료해준다는 말을 듣고 환자가 몰려 한옥 한 채를 나환자 요양소로 쓰기도 했다.

 

계명대 대구동산병원 의료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던 사료 34점이 문화재청의 근대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됐다. 사진은 1904년에 쓰던 외과 수술도구. [동산의료원 제공]

 

대구는 양반 문화와 보수적 분위기가 강한 지역이어서 기독교 전파가 쉽지 않았으나 제중원 덕분에 탄력을 받았다. 처음으로 안과 수술을 받은 환자가 크리스천이 됐는가 하면 소문난 절도범도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등 숱한 일화를 낳았다. 대구의 선교 책임을 맡은 북장로회의 제임스 애덤스 선교사는 1900년 대남소학교(현 종로초), 1902년 신명여자소학교, 1906년 계성학교, 1907년 신명여학교를 잇따라 세워 근대교육의 씨앗도 뿌렸다.

존슨 원장은 1903년 제중원을 지금의 대구동산병원이 자리 잡고 있는 중구 동산동으로 이전하고 1906년 새 건물을 지었다. 이 무렵 의학도 7명도 선발해 서양의학을 가르치기도 했으나 의사를 배출하지는 못했다. 1911년에는 동산기독병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1924년에는 간호부 양성소도 설립했다. 이는 나중에 계명대 간호대로 발전했다.

 

존슨 제중원 원장(맨 왼쪽)이 1908년 의학도를 선발해 근대 의술을 가르치고 있다. [동산의료원 제공]

 

제임스 애덤스 선교사의 아들 에드워드 애덤스 선교사는 1954년 최재화·강인구 목사 등과 함께 1954년 계명기독대학을 설립했다가 1965년 계명대로 이름을 바꿨다. 계명대가 1978년 의예과에 이어 1980년 의과대를 신설하면서 동산기독병원은 계명대 의과대 부속 동산의료원이 됐다. 현재 동산의료원은 대구동산병원, 계명대 성서캠퍼스에 지난해 신축 개원한 동산병원, 경주동산병원 세 곳을 운용하고 있다.

1931년 아치볼드 플레처 원장 시절 중국인 기술자들을 데려와 건립한 붉은 벽돌의 대구동산병원 구관은 역사적으로나 건축학적으로 의미가 깊어 2002년 국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2008년에는 문화재청이 1900년대 초 대구동산병원에서 사용했던 의료기구 32점과 의학 문헌 2점을 근대문화유산 목록에 올렸다. 이 가운데는 상아 청진기·외과 수술도구·휴대용 에테르마취기·금바늘 주사기·간접방사선 촬영기 튜브·미생물 배양기 등과 의학서적 '백초약학', 학술지 '조선간호부 회지'가 포함됐다.

 

9일 대구동산병원 비상대책본부 앞에 한국화훼학회와 인간식물환경학회가 보낸 화분이 놓여 있다. 화분에는 "꽃이 당신을 응원합니다"라는 격려 문구가 적혀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동산기독병원의 의사를 비롯한 전국의 서양 선교사들은 태평양전쟁이 벌어지면서 모두 쫓겨났다. 일제는 동산병원을 경찰병원으로 썼고, 6·25 때는 국립경찰병원 대구분원으로 활용됐다. 동산기독병원은 1953년 우리나라 최초로 아동병원을 설립해 전쟁고아를 무료 치료하기도 했다. 병원 임직원도 1921년부터 급여 1%를 떼서 어려운 이웃을 돕는 전통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대구를 사과의 고장으로 만든 존슨의 사과나무처럼 100여 년 전 그가 뿌린 헌신과 봉사의 씨앗이 무성한 가지를 뻗어 알찬 열매를 맺기를 기대한다. 의료진과 대구시민의 간절한 마음이 모인다면 코로나19도 머지않아 물러갈 것이다. (한민족센터 고문)

 

이희용 연합뉴스 한민족센터 고문

 

heeyong@yna.co.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