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하와이 이민선에 실은 미주 한인의 꿈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하와이 이민선에 실은 미주 한인의 꿈
  • 이희용
  • 승인 2020.01.0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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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의 글로벌시대] 하와이 이민선에 실은 미주 한인의 꿈

한인 102명을 태우고 처음으로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한 이민선 게일릭호. [국가기록원 제공]

(서울=연합뉴스) 대한제국 젊은이 121명이 1902년 12월 22일 인천 월미도 해상에 정박한 일본 선박 겐카이마루(玄海丸)에 몸을 싣고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신체검사에 탈락한 19명을 제외하고 102명이 미국 상선 게일릭호로 옮겨 타 이듬해 1월 13일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 입항했다. 오랜 여정으로 건강이 악화한 9명이 되돌아가고 93명만이 오하우섬의 모쿨레이아 사탕수수 농장으로 투입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 이민이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차이나타운을 형성해 미국인 상권을 위협하는 중국인과 파업이 잦은 일본인을 대신할 노동력을 한국에서 찾았다. 대한제국 조정도 식량 부족에 시달리던 터에 농장주들의 부탁을 받은 주한 미국공사 호러스 알렌이 건의하자 노동력을 수출하기로 했다. 고종은 미국인 사업가 데이비드 데슐러에게 모집과 송출 업무를 맡기는 한편 출입국 업무를 전담할 수민원을 궁내부에 신설했다.

하와이 동포들이 2003년 1월 13일 호놀룰루 칼라카와아 거리에서 이민 100주년 기념 퍼레이드를 펼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주요 도시의 기차역, 항구, 시장 등에 이민자를 모집한다는 공고가 나붙었으나 당시 한국인에게 수 만리 떨어진 태평양의 외딴 섬으로 이주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데슐러의 부탁을 받은 인천내리교회 선교사 조지 존스는 하와이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비유하며 적극 권유했다. 첫 승선자 가운데 인천 출신이 86명이고 그중에서도 내리교회 신도가 50여 명이었다.

게일릭호를 시작으로 1905년 8월 8일 도착한 몽골리아호에 이르기까지 하와이 이민선들은 56회에 걸쳐 7천226명의 한인을 하와이에 내려놓았다. 신체검사에 불합격한 479명을 뺀 실제 이민자는 6천747명이었다. 일본은 하와이 일본인 노동자들의 세력이 위축될 것을 우려해 한국 정부에 압력을 넣었다. 그러자 고종은 이민 금지령을 내렸다.

한인 이민자들이 처음 투입돼 일했던 미국 하와이주 오하우섬의 모쿨레이아 사탕수수 농장. 1982년 찍은 모습이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하와이는 한인 이민자들이 꿈꾸던 '약속의 땅'이 아니었다. 새벽부터 매일 12시간 동안 억센 수숫대를 잘라야 했고, 말도 통하지 않는 농장 감독자들의 비인간적 처우와 부당한 횡포에 시달렸다. 그래도 이들은 한인교회를 세워 공동체 결속을 다지고, 피땀 흘려 번 돈을 쪼개 독립자금에 보탰다. 1908년 3월 샌프란시스코에서 하와이 노동자 출신 전명운·장인환 의사가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를 처단한 것도 항일 열기에 불을 지폈다.

그러나 하와이 한인사회는 큰 문제를 안고 있었다. 대부분 혼기를 넘긴 총각이었으나 결혼할 길이 막막했다. 당시 미국에는 동양인과의 결혼을 막는 금혼법이 존재한 데다 결혼하러 모국을 다녀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농장주들은 음주·마약·범죄에 빠지는 노동자들이 생겨나자 작업 능률을 높이고자 사진 중매 결혼을 권장했다. 하와이 주정부도 신부들의 입국을 허가했다.

신랑감의 사진만 보고 하와이로 떠난 '사진 신부'들. [여성사전시관 제공]

모국 처녀들은 중매쟁이 권유에 따라 신랑감 사진만 보고 편지로 결혼을 약속한 뒤 하와이 땅을 밟았다. 일명 '사진 신부'는 1910년 11월 28일 입항한 목포 출신 최사라를 시작으로 동양인배척법이 제정된 1924년까지 950명에 이르게 된다. 이들은 사진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신랑의 모습에 실망하고 열악한 생활환경에 낙담했으나 고향에는 이미 결혼했다고 알려진 데다 되돌아갈 뱃삯도 없어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와이 이민자들이 가정을 이루자 한인 공동체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남편들이 농장에서 일하는 동안 아내들은 삯바느질과 빨래 등으로 생계를 돕고 2세들을 길렀다. 아이가 자라면서 학교도 속속 생겨났다. 한인들은 대륙으로도 진출해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를 비롯한 미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사진 신부' 천연희 씨가 1915년 미국 하와이로 출국할 때 일본 정부로부터 발급받은 여권.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그로부터 110년이 지나는 동안 재미 한인사회는 엄청난 양적 성장과 질적 발전을 이뤘다. 2019년 외교부 집계에 따르면 재미동포는 254만6천982명이다. 이전에는 중국에 이어 두 번째였다가 1위로 올라섰다. 미국 안에서도 각 분야에서 영향력을 키워가고 있다. 재미 한인사회가 2세, 3세, 4세로 내려가며 가지를 뻗고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것도 뿌리인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들의 헌신 덕분이다.

2003년 1월 13일에는 100년 전 게일릭호의 하와이 도착을 기념하는 행사가 대대적으로 열렸다. 미주한인이민 100주년기념사업회는 그해 5월 9일 '미주 한인의 날'(The Korean American Day) 제정을 결의했다. 기념사업회를 토대로 출범한 미주한인재단은 제정안을 각계에 청원했다. 2003년 10월 22일 로스앤젤레스 시의회와 2004년 1월 12일 캘리포니아 주의회에 이어 2005년 12월 13일과 16일 연방 하원과 상원은 차례로 제정 법안을 통과시켰다. 한인들이 미국 건설에 기여했음을 인정한 것이다.

2019년 1월 8일 미국 메릴랜드 주청사에서 열린 제14회 미주 한인의 날 기념식에서 래리 호건 메릴랜드 주지사와 한인 지도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내주 초 미국 각지에서는 한인 이민 117주년을 맞아 제15회 미주 한인의 날 기념행사가 펼쳐진다. 미주한인재단은 14일 워싱턴DC 연방하원의원회관 레이번빌딩에서 기념축전을 연다. 이희경 무용단 공연, 이문성의 궁중화와 종이문화재단 전시 등도 곁들여진다. 뉴욕한인회는 13일 기념식과 함께 우수 한인을 뽑아 시상한다. 캘리포니아 주의회는 이날 '미주 한인의 날 기념 결의안'을 채택할 예정이다.

미주 한인 이민사 속에서 하와이 초기 이민자와 함께 잊지 말아야 할 세 인물이 있다. 서재필, 안창호, 이승만이다. 1884년 갑신정변에 실패한 서재필은 일본을 거쳐 이듬해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1890년 6월 10일 한국인 미국 시민권자 1호가 됐다. 1월 5일은 사망 69주기이고, 1월 7일은 탄생 156주년 기념일이다.

왼쪽부터 서재필, 안창호, 이승만. [연합뉴스 자료사진]

안창호는 1902년 미국으로 가는 뱃길에서 망망대해에 우뚝 솟은 하와이섬을 보고 호를 도산(島山)으로 지었다고 한다. 그는 공립협회와 대한인국민회 등을 창설해 미주 한인사회의 기틀을 다졌다. 2002년과 2004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도산 안창호 메모리얼 인터체인지'와 '안창호 우체국'이 각각 생겼으며, 2012년 1월 애틀랜타 마틴루서킹센터 명예의전당에 아시아인 최초로 헌액됐다. 2018년 8월 캘리포니아 주의회는 탄생일인 11월 9일을 '안창호의 날'로 선포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광복 전까지 36년 동안 미국 땅에 머무는 동안 25년간 하와이를 근거지로 삼았다. 1960년 4·19 혁명으로 물러난 뒤에도 하와이로 건너가 1965년 7월 19일 호놀룰루 요양원에서 숨을 거뒀다. 인천과 하와이의 첫 글자를 딴 인하대는 이승만이 하와이에 설립해 운영하던 한인기독학원 처분 대금, 하와이 동포들의 성금, 인천시의 교지 기증, 국내 성금과 국고 보조 등으로 1954년 개교했다. (한민족센터 고문)

이희용 연합뉴스 한민족센터 고문

hee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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