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종암동서 만나는 이육사 애국혼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종암동서 만나는 이육사 애국혼
  • 이희용
  • 승인 2019.12.16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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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종암동서 만나는 이육사 애국혼

올 2월 처음 공개된 이육사 사진. 그가 1941년 생일에 서명을 담아 친구와 사촌들에게 나눠준 것이다. [이육사문학관 제공]

(서울=연합뉴스) "까마득한 날에/하늘이 처음 열리고/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중략) 지금 눈 내리고/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다시 천고(千古)의 뒤에/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육사(본명 이원록)의 시 '광야'는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오랫동안 실려 국민 애송시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일제강점기 암울한 상황과 시인의 강인한 기상, 조국 독립을 향한 단호한 의지와 광복 확신을 노래해 저항시의 본보기로도 평가받았다.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서울 성북구 종암동에 건립된 '문화공간 이육사' 1층 라운지. 이육사 얼굴과 대형 글씨가 관람객을 맞는다.

서울 성북구 종암동 62번지. 지금은 빌라와 단독주택이 빼곡히 들어선 이곳에 이육사는 1939년 이사해 '광야'를 지었다. 그러나 일제가 보기에 '불온한' 내용을 담고 있는 탓에 원고로만 전해지다가 그가 숨지고 광복을 맞은 뒤 1945년 12월 17일 '자유신문'에 '꽃'과 함께 발표됐다. 또 다른 대표작 '청포도'와 '절정'은 각각 1939년과 1940년 문예지 '문장'에 수록됐다.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서울 성북구 종암동의 이육사 '청포도' 시비(왼쪽)와 북바위둘레길 이육사시인길 안내판.

성북구는 주민 뜻을 받들어 이육사가 살던 마을 어귀에 이육사 연보와 '청포도' 전문을 새긴 시비를 세우고, 이 일대의 종암동 북바위둘레길 3구간을 '이육사시인길'로 명명했다. 4층짜리 건물 '문화공간 이육사'도 세워졌다.

1층 '청포도'를 도서 열람과 휴게 공간으로, 2층 '광야'를 이육사 상설전시실과 영상실, 3층 '교목'을 기획전시실과 커뮤니티 공간, 4층 '절정'을 옥상 정원 포토존과 사무실로 각각 꾸몄다. 각 층의 이름을 모두 대표작 제목에서 따왔다.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문화공간 이육사' 전시실 계단. 벽면을 이육사 연보, 성북구 연혁, 일제강점기 약사로 장식하고 그 아래 식민지 백성을 결박하려 한 일제의 탄압을 굵은 밧줄로 형상화했다.

'문화공간 이육사'는 74년 전 '광야'를 비롯한 미발표작 유고가 빛을 본 17일에 맞춰 개관된다. 3층 기획전시실에서 내년 3월 21일까지 특별전 '식민지에서 길을 잃다, 문학으로 길을 찾다'가 마련된다. 18일 오후 5시 1층 라운지에서는 초청특강 '육사의 외동딸, 이옥비 여사를 만나다'가 열린다.

이육사는 길지 않은 생애를 살며 시 34편, 평론 11편, 수필 13편, 번역물 2편을 남긴 문필가다.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을 오가며 무장투쟁에 적극 가담한 독립투사다.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문화공간 이육사' 2층 상설전시실에 이육사 연보와 유품 등이 전시돼 있다.

이육사는 1904년 4월 4일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에서 퇴계 13대손 이가형과 독립운동가 집안 허길의 6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24년부터 일본 도쿄(東京)와 중국 베이징(北京)에 유학했다가 귀국하던 1927년 10월 18일 대구에서 장진홍 의거가 일어났다. 여관 종업원을 시켜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선물로 보낸 상자 안의 폭발물이 터져 일본 경찰 4명과 은행원이 다치고 유리창 70여 장이 깨졌다.

장진홍이 1년 4개월 뒤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붙잡힐 때까지 이른바 '요시찰인물'이 줄줄이 경찰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았다. 이육사를 비롯한 원기·원일·원조 4형제도 주모자로 몰려 투옥됐다. 이후 17차례나 이어진 이육사 투옥 기록의 시작이었다. 그는 이때 받은 수인(囚人)번호 '264'(혹은 64)를 필명이자 아호로 삼았다. 1929년 5월 풀려난 뒤 11월 광주에서 비롯된 학생항일투쟁이 대구까지 확산되자 대구청년동맹 간부라는 이유로 이듬해 1월 수감됐고, 1931년에도 반일 격문의 배후로 지목돼 영어의 몸이 됐다.

1934년 6월 20일 이육사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갇힐 때 일제 관헌이 작성한 신원 카드. 얼굴 옆면과 앞면 사진이 붙어 있다. [이육사문학관 제공]

육사는 1930년 1월 3일 '이활'이란 필명으로 시 '말'을 처음으로 조선일보에 발표했다. 2월에는 중외일보 대구 주재기자로 채용됐다가 8월 조선일보 대구지국으로 옮겼다. 넷째 원조와 다섯째 원창도 각각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와 인천지국 주재기자로 일했다.

1932년 봄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10월 김원봉 의열단장이 난징(南京)에 세운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으로 입학했다. 이듬해 4월 동기생 26명과 함께 졸업한 뒤 7월 귀국했고 1934년 혁명간부학교 출신임이 드러나 구속됐다.

2018년 12월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이육사 친필 원고 '바다의 마음' 원본. [문화재청 제공]

1935년 육사는 정인보 집에 드나들며 문학 열정을 키웠다. 그곳에서 만난 시인이자 언론인 신석초와도 깊은 교분을 나눴다. 혹독한 고문과 거듭된 수감 생활로 몸이 쇠약해져 경북 포항과 경주에서 요양하기도 했으나 시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1937년 서울로 돌아온 뒤 대표작들을 쏟아내다가 1942년 모친과 형이 잇따라 숨지면서 실의에 빠졌다.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최인담 성북구청 학예사가 '문화공간 이육사' 2층 상설전시실에서 벽면의 단어를 손으로 누르면 해당 시어가 담긴 시가 화면에 나타나는 전시물의 감상법을 설명하고 있다.

더욱이 일제가 한글 작품을 발표하지 못하게 하자 한시(漢詩)만 쓰다가 1943년 4월 다시 베이징으로 건너갔다. 충칭(重慶) 등에서 독립운동가들을 만나 국내로 무기를 반입할 계획을 세웠다. 그해 7월 어머니와 형의 첫 제사 때문에 귀국했으나 일제에 체포돼 중국으로 압송됐다. 꿈에도 그리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베이징 일본영사관 감옥에서 이듬해 1월 16일 눈을 감았다.

친척이자 동지인 이병희 여사가 시신을 거둬 화장한 뒤 동생 원창이 유골을 국내로 갖고 들어왔다. 서울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했다가 1960년 고향 원천리로 이장했다. 광복 후 유시를 소개한 동생 원조는 1946년 '육사시집'을 출간했다. 2004년에는 탄생 100주년, 순국 60주기에 맞춰 고향에 이육사문학관이 들어섰다. 육사 시비는 이 곳과 종암동 말고도 그가 요양한 포항과 동해면과 호미곶, 서울시인재개발원 등지에도 세워졌다.

2004년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에 들어선 이육사문학관 전경. [연합뉴스 자료사진]

고인의 문학적 성취와 독립운동 공로를 두고 우열을 가리는 건 부적절하지만 윤동주보다 육사가 훨씬 덜 알려졌고 저평가됐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윤동주의 발자취는 한국·중국·일본에 비교적 잘 남아 있고 서훈 등급도 육사보다 한 등급 높은 건국훈장 독립장(3급)이다.

올해는 육사 순국 75주기이자 '청포도'와 '광야'(발표는 1946년) 탄생 80주년이다. 뒤늦게나마 7월 장편소설 '그 남자 264'(고은주 작)가 출간된 데 이어 그가 항일정신을 키우고 시상(詩想)을 떠올리던 곳에 내일 '문화공간 이육사'가 문을 연다. 이곳이 주민의 소통 공간이자 후세의 교육 공간으로 요긴하게 쓰이기를 기대한다. (한민족센터 고문)

이희용 연합뉴스 한민족센터 고문

hee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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